트랙터 때문에 지각하는 삶이란

추수 시즌에는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서야 한다.

by 시골학교 선샌님

가을이면 출근길에 트랙터가 등장한다. 길도 일차선이라서 피해 갈 수도 없다. 앞지르기는 아직 무섭다. 졸졸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내 차를 학교 사람들과 아이들이 안다. 선생님이 앞지르기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해질 수 있다. 무슨 면목으로 아이들에게 교통안전 지도를 하겠는가! 무슨 면목으로 규칙을 잘 지키라고 하겠는가!


'졸졸졸... 졸졸졸...'

속이 터질 것 같아 한숨을 깊게 쉬다가 창밖을 본다.

길을 따라 은행나무가 줄지어 보인다. 온 세상이 노랗다. 은행나무를 넘어 황금빛 논밭이 펼쳐져 있다. 아침 햇살에 뽀얀 하늘도 보인다. 아침 특유의 몽글몽글한 색채가 있는 듯하다. 꼭 르누아르의 그림 같다. 경계선에서 색을 부드럽게 문질문질한 느낌이다.


'그냥 지각하자. 몇 분이면 뭐.'

깔끔히 포기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풍경을 감상한다. 저 너머에 산이 보이고 논밭을 가로질러 큰 하천이 흐른다. 그리고 저 앞에 조그마한 학교가 보인다. 우리 학교다. 금방 닿을 것 같아도 참 멀게 느껴진다.


학교 교문에는 항상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상주하고 계신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도착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여기는 교통편이 안 좋아 시청에서 스쿨버스를 지원해 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한다. 그런 아이들을 걱정하시는 선생님들의 마음은 참 따듯하지만, 내가 혹여나 지각을 하는 날이면 정말 민망하다. 차 안에서 뻘쭘하게 인사드리면, 교장 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 인자한 미소로 답해주신다. 그러다가 손목시계를 확인하시는데, 지각하지 말라는 말보다 타격감이 있다.


몇몇 아이들은 나와 스쿨버스보다 먼저 등교하기도 한다. 더 시골 안쪽에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께서 차로 데려다주신다. 그런 아이들은 기다리는 동안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데, 그 뒷모습이 좀 귀엽다.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툴툴 차보거나, 교실에서 그림을 끄적끄적하거나, 신기한 물체(주로 돌, 거미, 사마귀, 개구리) 같은 것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내가 도착하면, 이제야 오셨냐는 듯 환하게 인사한다. 그리고 "선샌님, 선샌님!" 하며 아침에 본 것들을 조잘조잘 얘기해 준다. 개구리의 종류라든지, 거미와 사마귀가 싸우고 있다든지, 킨더조이에 어떤 장난감이 나왔는지...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다 내게 와르르 쏟아내는 것 같다.


이 학교에는 기다림의 낭만이 있다. 트랙터를 기다리며 창밖 풍경을 감상하고, 스쿨버스를 기다리며 안도감을 느끼고, 친구들과 선생님을 기다리며 반가움을 만끽한다. 요즘은, 특히 도시 생활에서는 기다릴 일이 많이 없다. 교통도, 배달도, 서비스도 점점 촘촘해지고 빨라진다. 심지어 기다릴 때도 마냥 기다리진 않는다. 가령 약속시간에 친구가 늦으면 카페에 들어가 스마트폰을 하거나, 팝업 스토어를 구경하거나, 올리브영에서 뭔가를 산다.


로맨스 영화를 보면 기다림의 낭만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기차는 종종 연착되고, 스마트폰은 없고, 사랑하는 사람은 오지 않고. 지금이야 카카오톡으로 '너 어디야? 언제 와?'하고 예정 도착시간까지 유튜브를 보며 기다리면 되는 것을. 기대감에 부풀러 하염없이 누구를 기다리는 것은 참 무모하지만 낭만 있는 일인 듯하다.


나도 이제 그 낭만을 즐겨보리라. 트랙터 뒤에서 아침 풍경을 음미하며, 아이들과의 아침 대화를 기대하며, 날 기다리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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