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를 좋아한다고 하면 많이 묻는 질문은 MBTI의 마지막 자리가 J냐는 것이다. MBTI 마지막 자리는 J와 P로 갈리는데, 흔히 J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고 P는 미리 판단하거나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구분하고 버리고 줄 세우는 일을 좋아하다 보니 사람들은 당연히 ‘정리인’들은 J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묻는 것이다. 뭐. 일단 대답부터 하자면 나는 J가 맞긴 하다.
나는 요일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해야 할 일을 정해놓는 편이다. 여행을 가면 당연히 분 단위로 계획을 짠다. 옷을 살 때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기 위해 계절이 시작되기 전 모든 옷을 체크하고 버릴 것들은 비운 후, 정해진 개수만큼 상하복을 채워 놓는다. 이것은 물론 남편과 아이 옷도 마찬가지이다. 장은 일주일치를 몰아서 보는 편이고 사면 모두 손질 후 소분하여 밀키트처럼 만들어 놓는다. 대용량으로 봐야 할 식재료와 어쩌다 한 번씩 사게 되는 식재료를 구분하고 기간을 정해 구입한다. 남편의 월급이 들어오면 각각의 목적 통장으로 자동이체되며 주어진 생활비에서 생활한다. 모든 돈의 흐름은 한눈에 보일 수 있게 엑셀 파일로 정리되어 있다.
뭐. 이 정도면 제법 J 앞에 ‘파워’도 붙일 짬바는 되지만 J와 정리의 관계성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가장 가까운 예로 남편의 경우 정말 나는 명함도 못 내밀 슈퍼파워 J이다. 만약 J가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남편으로 태어났겠구나 싶다.
작년 겨울, 미국에서 23박 24일의 여행을 준비할 때였다. 크루즈 여행을 포함하여 플로리다와 뉴욕까지 보고 올 야심 찬 계획을 세운 우리는 각자 잘하는 분야로 여행 준비에 나섰다. 나는 23박 24일의 짐을 캐리어 3개에 넣어야 하는 미션에 부딪혔다. 특히나, 플로리다에서는 여름옷을, 뉴욕에서는 겨울 옷을 입어야 했기에 챙길 짐은 두 배였다. 정리 덕후인 나에겐 이것은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신나는 도전이자, 꽤나 머리 아픈 과제였다. 덕분에 모든 여행 일정은 ‘계획의 신’ 남편에게 돌아갔는데 남편은 거의 세 달 전 모든 비행기표와 숙소 예약을 마쳤고 여행 두 달 전부터는 여행 계획 짜는 일에 착수하였다. 모든 관광지 조사부터 최소한의 동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깐깐한 나의 취향과 그보다 더 꼬장꼬장한 딸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여행지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엄선된 여행지들은 무려 13장의 보고서로 탄생하였고 남편은 세 차례의 브리핑을 위해 학교 회의실을 빌렸다. 넓은 회의실에서 단 둘이 앉아 PPT 화면을 보며 앞으로의 여행 계획을 듣고 있는데 앞으로 남편 앞에서 계획으로 주름잡으면 안 되겠단 다짐을 단단히 하였다.
서문이 길긴 했으나 이렇게 계획형 인간인 남편이 정리를 잘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NO!’ 완전 NO이다! 남편의 그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계획성은 어쩐지 정리에서 만큼은 통하지가 않는다.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남편에게 정리는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듯하다. 물론 살림이 주요 업무인 나와 회사 일이 메인인 남편에게 있어 ’ 정리‘의 중요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토록 철저한 사람이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은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은 시각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심히 걱정되는 일이다.
남편뿐만 아니라 내 주변을 봐도 J형 인간이 반드시 정리를 좋아하거나 잘한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매우 자유분방하지만 집에 가면 의외로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에 놀라게 하는 사람도 많다. 연예인 노홍철 님 역시 계획된 삶보다 즐거운 일을 벌이며 행복하게 사는 분인데 그 역시 유명한 ‘정리인’이다. 삶에서는 의외성을 즐기되, 물건에서만큼은 정제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MBTI를 핑계삼지 않길 바란다. 때때로 나에게 P를 들먹이며 자신은 정리에 소질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정리와 계획은 서로 닮아있되, 완전히 같은 이야기는 아니므로.
P들이여, 당신들도 ‘정리인 ‘이 될 수 있다.
용기를 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