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킬러와 함께 사는 법

나는 식목일이 두렵다

by 또랭

제법 큰 택배 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의 크기만 봐도 이건 내가 시킨 게 아니다. 10kg짜리 건빵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는 큰 손 남편의 것임에 틀림없다. 이번엔 무얼까 두려움에 떨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의외로 작은 나무 한 그루가 나왔다. 생각해 보니 며칠 전부터 계속 무언가를 시킨다, 시킨다 했는데 이거였구나. 분명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던 것 같은데 남편은 그새를 못 참고 저질렀나 보다. 그러다 슬쩍 달력을 보니 그럴 만도 하겠구나 싶었다. '식목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남편 역시 우리나라 남자들이 한 번씩 품어보는 시골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다. 아니 그리워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남편은 어렸을 때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겨져 사촌들과 자란 기억이 있다. 참새랑 메뚜기를 구워 먹고 잠자리와 개구리를 잡으며 자연에서 놀던 그때가 자기 삶에서 가장 행복했노라며 아이들은 자연에서 자라야 잘 자란다고 늘 목놓아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머님께 확인해 본 결과 본 투 비 촌놈이라고 외치던 남편의 주장과 달리 남편이 할머니 댁에 맡겨진 건 단 몇 개월에 불구하며 30년 넘게 쭈욱 서울에만 산 찐 중에 찐 서울 토박이 임이 밝혀졌다.


어쩐지 경상도 사투리를 나보다도 못 하더라니...


이유야 어떻든 남편의 시골 사랑은 유난스럽다. 정확히 말하면 텃밭 가꾸기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결혼 전 늘 그렇듯 흥분에 들떠 꼭 갈 데가 있다고 하여 따라나섰더니 'oo구 도시농부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쓰여 있는 큼지막한 플래카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 씨앗과 청상추 씨앗, 호미와 삽이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받아 들자 이곳이 구에서 운영하는 주말 농장 당첨자들 위한 오리엔테이션 장임을 알게 되었다. 어디 내다 팔기까지 할 계획인지 대부분 한 구획씩만 분양받는 텃밭을 호기롭게 두 구획이나 신청했단다. 격양된 남편과 달리 나는 쭉 짼 눈을 하고 남편을 쳐다봤다.


우리 결혼식이 네 달 남은 시점이었다.


남들은 결혼 전 피부 미용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에스테틱도 받고 이런저런 시술도 받는다던데 나는 무슨 팔자기에 주말마다 자발적으로 기미를 형성하며 밭에서 잡초를 캐고 있는가. 어이가 없다가도 챙 넓은 모자, 가드닝용 장갑, 호스, 양동이 등을 열심히 고르고 있는 나를 보면 일 저지르는 남편보다 동조하는 내가 더 문제구나 싶어 어디 억울하다 말도 못 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말 농장 체험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 매일 돌봐도 모자란 농작물들을 일주일에 한 번만 가서 돌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주말 농장 장소도 차로 30분은 가야 하는 곳에 있어서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남편의 바쁜 회사 생활로 주말 중 하루를 빼는 것도 힘들었던 우리는 농작물보다 드레스를, 잡초보다 집 찾기를 우선시했다. 그리고 겨우 시간을 만들어 농장을 찾았을 땐 이미 잡초 밭인 지 텃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건 아니다 싶어 말라비틀어진 농작물과 잡초들을 싹 다 뽑고 정리하고는 포기 선언을 했다. 그렇게 남편의 첫 텃밭 가꾸기 계획은 기미만 잔뜩 얻은 채 끝이 났다.


솔직히 나는 내심 잘 됐다고도 생각했다. 식물을 키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을 테니 이제 다시는 남편이 뭐 키우잔 말은 안 하겠지 싶었다. 그러나 남편은 건넛 집이 빤히 보일만큼 앞이 꽉 막힌, 그러니까 빛이라곤 한 줌 없는 빌라 난간에서도 상추와 토마토를 심겠다며 화분을 사들였다. 특히나 식목일은 이 명분을 충분히 채워 줄 가장 최적의 날이었다. 나는 식목일은 식물을 키우라고 있는 날이지, 죽이기 위해 있는 날이 아니라며, 이곳은 식물이 잘 자랄 환경이 아님을 끊임없이 어필했지만 남편은 지구 마지막 날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스피노자로 빙의하여 끊임없이 심고 또 죽였다.


얼마 전 쓸데없이 베란다만 넓은 30년 된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오래된 집이라 짐 넣을 곳이 부족해 나는 이 베란다에 최대한 잡동사니를 쑤셔 넣을 계획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남편 역시 이 곳이야말로 식물 키우기의 최적의 장소임을 눈치채고 자기만의 베란다 정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남편이 일을 저지르기 전에 재빨리 잡동사니들을 채워 선수를 쳤지만 얼마 안돼 야금야금 남편의 화분들이 나의 잡동사니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집에서 작물을 재배한다는 남편의 계획들이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리고 저 식물들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순간 화분 가꾸기는 모두 내 차지가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이런 응달에서는 상추가 자라지 않는다, 토마토 나무줄기를 보니 매가리가 없다, 이제 곧 죽는다며 잔소리만 늘어놓고 손을 보태지 않았다. 매번 반복되는 남편의 식물 대학살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이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합리화하기 바빴다.


그런데 베란다에 놓아둔 식물들이 예전의 아이들과 조금 다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쨍한 초록빛을 뽐내며 날이 다르게 쑥쑥 커 가질 않나, 죽었나 싶은 화분도 물을 한 번 주면 다시 살아나질 않나. 한 번도 겪지 못한 푸릇푸릇한 생명력이 식물들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에 작은 일렁임이 생겼다. 그리고 얼마 전 남편이 봄 되자마자 심어 둔 딸기 모종에서 귀여운 하얀 꽃이 나오자 게임은 끝났다. 나는 고 작고 귀여운 흰둥이들을 보러 문 지방이 닳도록 베란다를 오갔고 식물 돌보기는 예상대로 나의 몫이 되었다. 하아.


이번 식목일에 들여온 식물은 '유주 나무'였다. 아이 이름과 같은 나무. 이 나무를 잘 키우면 낑깡보다 조금 큰 유주라는 열매가 열린단다. 아이는 벌써부터 신이 났다. 나무에 자기가 열린다며 웃겨 죽는단다. 나는 또 '유주 나무 키우기'로 열심히 검색하며 또 하나 늘어난 군식구 보살필 방법을 강구했다. 왠지 이 나무는 절대 죽이면 안 될 것 같다.


얼마 전 끝난 '사랑의 불시착'이란 드라마에서 리정혁 동무가 토마토 나무에게 해주던 예쁜 말들이 생각나 검색해 보았다.

'햇빛, 이슬, 양털구름, 삼색 고양이, 장미, 산들바람, 첫눈...... 피아노'

나도 우리 초록이들한테 아름다운 말들을 좀 해 줘야겠다.

'빵, 떡, 커피, 자유 시간, 수다, 남이 해주는 밥..... 잠'

흠...잘 크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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