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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습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by 유동


내팽개쳐진 가방. 상의에 땀이 좀 묻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거울을 슬쩍 봤다. 수염자국이 불규칙적으로 나 있다. 편의점에서 천 원짜리 면도기를 산다. 전동 면도기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예전 쓰던 가방을 막 다루곤 했다. 이 여파 덕인지 면도기가 부서졌다. 주섬주섬 다시 조립하고 싶었지만 어림없다. 정말 박살 난 전기면도기. 분리수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찾았다.


다시 면도기를 사야 한다. 레이저 제모를 받고 있는 나. 딱히 쇼핑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관리를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레이저만 믿다가 면도를 안 하면 꽤나 기괴한 모습이 연출된다. 턱 앞부분은 아직 색소가 많이 남아서 수염자국이 일부 남아있다. 하지만 구레나룻 부분과 턱성 쪽은 수염자국이 많이 지워졌다. 이럼 어떻게 되냐? 일부는 깨끗한데 또 다른 부분은 수염자국이 몇 있는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수염자국이 군데군데 난 것이다. 당연히 얼굴 전체가 바야바인 것과는 훨씬 낫겠지만 여전히 징그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노트북 앞에 선다. 쿠팡에 '전동면도기' 검색한다. 사실 면도기 잘 모르기 때문에 저번에 샀던 것과 비슷한 가격대를 고르기로 한다. 습관이 된 전동면도기 구매. 결정장애 중증인 나는 가끔 뭘 고를지 매번 고민한다. a 아님 b? 사실 나의 선택은 '둘 다 안 한다'쪽에 가까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이번 전동면도기는 어렵지 않게 고를 수 있었다.


간단하다. 이건 이제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뭘로 해야 할지가 아니라 무조건 했어야만 했다는 것. 그게 내 이유였다. 이걸 빼는 순간 뭔가 내 팔, 다리 한쪽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 면도를 해도 푸르스름하게 나와있는 꼴을 보자면 정말 병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다른 습관은 피부관리다. 전에 비하면 나아졌지만 지금도 가끔 보면 모공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 전에 꿀잠 마스크팩을 비롯한 이것저것들을 바른다. 피지 관리에 개선이 되고 어쩌고 저쩌고.. 일단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바르기로 한다. 슥슥슥슥. 약 한 움큼 쥐고 물(아니면 제로콜라)을 마시면 잠 잘 온다. 질끈 감는 눈. 자유인이 되고 난 후 9일이 지났다. 소집해제 하고 늦게 자면 어떡하지 싶었다. 그런데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있어도 자는 시간이 오히려 당겨진 건 다행이다. 적당히 늦게 자는 습관이 일찍 잠에 드는 버릇으로 바뀐 것이다. 요즘은 늦어도 1시면 잔다. 일어나면 공부할 것도 있다. 요즘은 GTQ를 따려고 하고 있다. 언젠가 외국어도 다시 도전하고 싶은 걸. 목표가 습관이 되면 나조차도 징그러워지지만 이게 전적으로 단점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오히려 좋으면 좋은 거지.



하지만 이 모든 습관에는 허점이 있다.


항상 내가 사랑했던 것이 나의 습관이 된다. 피부관리를 받는 것도, 면도기를 사는 것도, 일러스트레이터 자격증을 따고 싶어 했던 것도, 아니 사소한 모든 것이 다 나에겐 사랑의 흉터로 남아있다. 연애감정으로 국한 짓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차라리 그럼 고맙기라도 해서 억울하지도 않음). 한때 나보다 더 소중했던 사람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더 나아진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에게 남긴 선물이 나에겐 아직도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있다.


비단 전에 쓰던 가방만 봐도 그랬다. 이젠 습관이 됐다. 예쁜 의류들을 많이 파니까 자주 가는 나. 사실 그 이전엔 빈티지샵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이즈를 찾고 매치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꾸역꾸역 간다. 레플 한 장에 10만 원을 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수집에 적극적이었다. 왜일까. 사고 싶어서 산 부분도 있지만 왠지 난 거기에 끼고 싶었거든.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느낌이 궁금했다. 그런 거 산다고 당연히 같은 곳 바라보는 거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구매하고 난 다음이 중요하겠지. 이런 거 사면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의 습관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아직도 남아있는 몇 가지 습관들. 레이저로 얼굴을 지우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도 한동안 깊숙하게 있던 몇 사람들을 위해 하던 일인 걸. 이런 습관들이 모여 나 자신이 됐다. 하지만 이 나 자신이 됐다는 사실에게서 몇 가지 탄식이 느껴졌다. 습관을 지킬 사람이 몇 명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게 습관이 될 즈음이면 상대는 이미 대부분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이거 했고, 내일은 저거 할 거고, 덕분에 뭘 이뤘다. 이 모든 습관의 도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많이 아낀 만큼 더 깊은 습관이 되어버렸다. 잊지 않을 것 같았는데 조금씩 잊혀간다는 것이 더 서럽다. 젠장.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사랑을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 이제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들이 야속해서인지. 아니면 날 알아봐 줄 단 한 사람이 내 곁에 없기 때문인지. 무슨 습관이든 만들어도 도착지가 늘 애매해지는 나 때문인지. 시간은 항상 돌아온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에게 남긴 습관은 늘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혼자가 된다. 외로운 삶. 난 나를 믿는다. 내 판단을 믿고 나라는 사람을 신뢰한다. 그래도 습관 하나만 믿고 일상을 살기엔 요즘은 살짝 버거운 걸. 이별하는 일이 점점 더 두려워진다. 나이가 들고 있다는 뜻일까. 날 의지하는 이는 몇 있어도 내가 기댈 곳은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더 깊어져야 하나봐. 아니면 이 고독이 당연했거나. 습관처럼 다가온 쓸쓸함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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