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아무도 나를 좋아할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 이런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 주장의 가장 그럴싸한 근거는 나 조차도 나를 좋아할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믿음은 그저 생각일 뿐임에도 때론 그 어떤 과학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다. 스스로가 깊게 판 구덩이에 빠진 나는 그저 결심하지 않으니 죽지 않을 뿐이었고,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느린 자살’이 내 삶을 지배해갔다.
그런 지배는 느리다고 해서 얌전하지만은 않다. 우울함은 굉장히 생산적인 친구라 불안, 무기력, 허무 등 많은 부산물을 낳는데, 그것들이 또 나를 시끄럽게 괴롭힌다. 마치 우울함이라는 대장이 진두지휘하는 커다란 부대처럼, 그것들이 한 번에 몰려올 때면 두려움에 질린 나는 구덩이로 더욱 숨고만 싶었다. 또 가끔은 그 혼자만의 구덩이 안에서 가장 커다란 안락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위에 다른 구덩이들을 발견했다. 수많은 구덩이들. 주변을 돌아보니 우울은 오랜 유행처럼 만연해 있었다. 치료를 위해 상담을 받거나, 약을 먹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우울을 견디는 또래의 사람들이 생각보다(사실은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무척 많았다. 내게는 정말 멋지고, 유쾌하고, 용기 있는 친구들인데 그들 역시 각자의 깊은 구덩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우울이 멍청한 나에게만 찾아온 기이한 불운 같은 게 아니었나.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편한 세상인데 왜 나는, 우리는 이렇게 우울한 걸까.
저마다의 이유로 우울은 찾아온다. 그 무수한 이유를 골똘히 고민해보아도 답은 아득하다. 그래서 대신 우울을 견디는 형태에 대해 기록해 보기로 했다. 물론 이 기록이 암을 이겨낸 밥상의 비밀 같은 비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 구덩이가 평생에 걸쳐 나를 감싸고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나마 믿고 있다. 그저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우울이라면, 계속해서 끈질기게 찾아올 이 친구를 덜 지겹게 맞이하도록 여러 방법쯤은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수많은 구덩이 중 어떤 하나는,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런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내겐 우울을 맞이하는 다양한 형태 중 하나다.
단, 이 기록은 ‘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전하는 글로 둔다. 스스로의 우울에 취하는 것은 볼썽사나우니, 나를 좋아하는 너에게 라면 우울을 조금은 말려 건조하게 건넬 수도 있을 것 같다. 점점 냉소적이 되어 나조차도 무서운 내가 조금은 더 다정하게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없다고 믿는 너에게 그런 마음으로 쓴다. 구덩이 속의 나와 그런 나를 조금 다정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확신 없이 그저 모든 것이 물음표인 채로 시작, 그냥 해 보기로 한다.
*그림 / Smantha French, <holly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