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기다리게 하는 것
친구 B가 대뜸 어떤 링크를 보냈다. 썬캐쳐 원데이 클래스. 예전에 드라마 <상속자들>에서 악몽을 잡아준다며 여주가 남주에게 선물하던 드림캐쳐는 봤지만, 썬캐쳐라니. 햇빛을 잡아두고 기우제라도 지내는 걸까 싶었는데 해가 잘 드는 곳에 걸어두어 빛을 모으고 좋은 기운을 불러주는 장식이란다. 의미부여라는 게 참 그렇다. 무슨 요일이 편하냐고 B에게 답장을 보냈다.
토요일 오후, '친구 따라 강동 간다' 격으로 B와 함께 한성대 입구 근처 한적한 공방을 찾았다. 사방이 창문으로 탁 트여 성북동의 한적한 전경이 아름답게 보이는 공간이었다. 공방에 있던 메롱, 헤롱, 루롱이라는 세 마리의 강아지가 낯선 우리를 보고 왕왕 짖다가 금세 조용해졌다.
먼저 선생님께서 어제 우리가 보냈던 그림의 도면을 보여주셨다. 자유 도면을 하려면 원하는 이미지를 보내고 선생님께서 유리 작업이 가능하도록 좀 더 단순화된 도면으로 만들어주는 식이었다. 꽃, 펭귄, 선인장 등 기존의 예쁜 도면도 많았지만 나는 자유 도면을 택했다. 화투 칠 때 '못 먹어도 고'를 할 배짱은 없어도, 삶의 모토는 '서툴러도 자유 도면'인 것이다. 같이 간 B 역시 역시 자유 도면을 택했다. 초록은 동색인 게 참말이다.
우선 손을 보호하기 위해 라텍스 장갑을 끼고 곧바로 연습용 유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처음 써보는 유리칼은 쉬이 손에 익지 않았다. 손에 쥔 채 약간 힘을 주어 누르면 촉에서 휠이 나오는 모양이 칼보다는 펜과 닮았다. 일정한 힘으로 눌러주며 유리 위에 선을 그어야 하는데, 그 꾸준함이 어렵다.
선을 긋고 나면 뺀지와 비슷한 모양의 도구로 선 부분을 꽉 집어 유리를 쪼갠다. 유리에 그린 선은 수정할 수 없으니 더욱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무엇보다 곤욕이었던 건 내 도면이다. 여러 풍선이 달린 열기구 도면은 9할 가까이가 곡선 작업이다. 유리는 곧게 잘리는 성질이 있어서 원 모양으로 자르기는 더 어렵다. 적은 곡률의 선을 여러 번 그어가며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작업을 해도 통조림 뚜껑처럼 완벽한 원을 그리진 못한다. 조금은 어설픈 나의 원들을 선생님이 기계로 갈아서 다듬어주시면 그제야 밑 작업이 끝난다. 말 그대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이건 주변에서 내게 가끔 하는 말인데 도면도 주인을 닮나, 싶었다. 손이 많이 가는 타입.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썩 좋진 않다.
자칫 투데이 클래스가 될 뻔한 내 도면이지만 좋았던 점도 있다. 풍선이 될 유리를 여러 개 골라야 했는데, 그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 유리는 후레시를 유리에 비춰보고 저마다의 빛 그림자를 확인하며 고른다. 색도 색이지만 파도 같은 물결무늬나 화려한 문양의 타일, 기포가 있거나 아주 평평한지에 따라 빛 그림자의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점점 만들면서 욕심이 생긴 나는 뭉쳐있는 풍선끼리 색이 겹치지 않게 하면서도 이왕이면 다양한 재질의 유리를 쓰고 싶었다. 몇 번이나 서로 조각끼리 옆에 둬 보고, 후레시로 빛 그림자를 만들어보고, 감탄하고, 다시 바꾸고를 반복했다. 마지막 조각으로 기포가 있는 유리를 쓸지가 고민이었다. 기포가 흠처럼 보여 조금 망설였는데 정작 빛 그림자를 보니 그게 또 나름의 무늬를 만드는 게 예뻤다.
이렇게 나의 선호를 온전하게 고민하고 선택해본 시간이 언제였을까. 식사만 해도 회사에서는 그저 가깝고, 기다림이 적은 적당한 식당 몇 개를 대충 번갈아 간다. 특히 자취하는 집(아닌 방)에서는 '식사를 한다'가 아니라 '끼니를 때운다' 격으로 그저 꾸역꾸역 넘기는 일이 많다. 간단히 셰이크를 타거나, 쌓아둔 레토르트 식품을 돌려 먹거나 그런 식. 일상에서 소비의 행태는 대개 그랬다. 적당한 예산 내에서 고르는 적당히 싫지 않은 것들. 무엇이든 적당히 이쯤이면 괜찮다, 가 채우는 취향의 부재. 그래서인지 뭐가 더 좋을지를 열심히 고민하게 만드는 오랜만의 욕심이 반가웠나 보다.
다음 단계는 각 조각마다 납 테이프를 감싸는 것이다. 납 테이프 부분을 맞대고 땜질을 해서 조각끼리 붙인다. 내가 여러 풍선 조각으로 씨름을 할 동안 손재주가 좋은 B는 어느새 각 조각마다 납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다. 나는 속도가 늦으면서도 평소보다 들뜬 상태로 선생님께 주절주절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이런 공예를 알고 시작하신 거예요? 이렇게 유리를 붙이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때요? 여긴 창이 많아 탁 트인 전경이 예쁘네요, 등등.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가끔 나는 과도하게 밝아진다. 그러고 나면 스스로가 가면을 쓰고 어설픈 연기를 한 광대처럼 초라하게 느껴진다. 내가 그렇게 재잘거릴 동안에도 본인의 몫을 먼저 끝낸 B는 별 말없이 내가 테이프를 붙이는 걸 도왔다. 묵묵히 도와주는 B가 고마웠다. B의 과묵함이 부러웠다.
테이프질을 끝낸 후 납땜을 시작했다. 안전용으로 좀 더 두툼한 작업 장갑을 꼈다. 납 부분에 플러스라는 크림을 바르고 인두기로 열을 가해 붙인다. 다 붙인 조각을 다시 한번 세척을 하면 세수한 사람처럼 뽀얘진다. 뽀득뽀득 닦고 나니 구릿빛 납 테이프가 은색으로 변한 게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줄을 달고 마무리를 지으니 딱 빠듯한 4시간이 지나있었다. 해는 진지 오래라 사방의 창문이 온통 까맸다. 썬캐쳐가 잡을 햇빛이 남아있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아, 햇볕 쨍한 오전반에 오셨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조명보다 진짜 햇빛으로 보면 정말 더 예뻐요'를 다섯 번 정도 말씀하셨다. 우리보다 더 안타까워하시며 자꾸만 그 말씀을 반복하시는 게 귀엽게 느껴졌다. 그게 진짜 썬캐쳐를 좋아하는 마음 같아 그랬다.
내일은 날이 맑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모처럼만에 내일이 기다려지는 그 마음이 썩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