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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비또바 Sep 15. 2020

얼떨결에 필라테스

 지하철역을 나서다 전단지를 받으면 항상 광고 효과에 대해 생각해 본다. 대개는 길바닥에 버려질 텐데 과연 사람을 고용해서 나눠주는 만큼의 효과가 있을까. 그 노동이 헛될까 싶어 받은 전단지를 한 번 힐끔 살피게 된다.

 광고 효과는 의외로 괜찮을지 모른다. 직접적인 소비 행위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가령 누군가가 길을 물어볼 때, 필라테스 전단지를 본 내가 ‘서울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오시면 ABC 필라테스가 있거든요. 거기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가세요’ 식으로 표현해서 2차 홍보효과를 줄 수도 있다. 이 역시도 소비 행위로 연결될지는 의문이지만. 끝없이 홍보만 되고 아무도 회원 등록을 안 하면 어쩌지.


 월 99,000원, 론칭 기준 특별가, 체형에 맞게 수업합니다.


 안 그래도 운동을 하려던 참이었다. 재작년쯤 다니던 구민체육센터는 규칙적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코로나 때문에) 그만둔 지 오래다. 이전에는 수영, 스쿼시, 리듬체조를 했었다. 스쿼시와 수영은 재미있었지만 하려는 시간대에 사람이 너무 붐벼서 반년 정도 하다가 그만뒀다. 핑곗거리는 많다.


 반면, 리듬체조는 한 달을 겨우 버텼다. 리듬체조라는 이름 하에 각종 아이돌 춤을 섭렵하는 곳이었는데 동작을 배우기보다 앞에서 추는 분들을 보고 눈대중으로 따라 추는 식이다. 대부분이 중년분들이시고 20-30대는 한 명 있었나. 어떻게 저분들은 춤을 다 알고 있나 봤더니 이따금씩 새 곡이 나왔을 경우 하루 이틀 정도 동작을 나눠 익힌다. 그 날을 놓치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저 앞사람들을 보고 따라 출 것. ‘스스로 알아서 배우고 살아남아라'는, 정말 고인물의 현장. 그런 정글에서 유쾌하게 한 달을 버티고 도망쳤다. 소녀시대 Holyday 후렴구의 몇 동작만을 겨우 익힌 채.



 익히 들어본 필라테스는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등록을 하러 갔더니 ‘6개월 이상’이라는 조건에 잠깐 당황했다. 전단지를 꼼꼼히 보지 않은 탓이다. 대개 이런 식인 것을. 60만 원이 한 번에 나가니, 매달 넘기지 않던 신용카드 실적 100만 원도 금방 채웠다. 다행히 6개월을 견딜 수 있을 만큼 필라테스는 꽤 잘 맞았다. 나는 아직까지 땀이 좀 나야 운동을 한 것 같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요가보다는 좀 더 근력을 써서 운동한다는 느낌이 나는 게 좋았다.


 적응이 어려운 건 운동복이었다. 딱 달라붙는 레깅스와 쫄쫄이 상의. 이렇게 붙는 옷을 입고 운동을 하는 건 수영 말고는 처음이다. 창피할 것 없다고 머리로는 알아도 자꾸만 창피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를 선점하고자 애썼다. 사람들 앞에서 내 몸과 어정쩡한 포즈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뒤 돌게요' '창문 쪽 바라볼게요' 여러 방향으로 바꿔가며 동작을 하기 때문에 애써 뒤로 숨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정작 운동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도 없고. ‘통통한 허벅지, 삐죽 나온 뱃살. 근데, 뭐?’가 된다. 자주 접하면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힘이 크다. 그래서 무섭다.


 필라테스에는 체어, 배럴, 리포머 등 여러 기구가 있다. 모든 기구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건 임프린트와 뉴트럴이라는 자세다. 오리 엉덩이처럼 허리를 펴거나 아랫배에 힘을 줘서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한다. 강사님은 이 두 동작과 호흡이야말로 필라테스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다. 그게 그냥 하면 쉽지만 다른 동작과 연결할 때에는 '호흡이고 나발이고'의 상태가 된다. 빨리 카운트만 끝나길 바라고, 내가 쉬는 것이 들숨인지 날숨인지 헷갈린다. 때마침 '세 개만 더 갈게요'를 하는 강사님. 타이트한 운동복은 익숙해져도 이건 잘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함은 선택할 수 없는 게 참 얄궂다. 그러다 보면 한 시간이 후딱 간다. 동작 하나하나는 그렇게 느린 카운트였지만 50분은 빨리 가는 게 신기하다.


 아직 등록기간 6개월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회사 일이 바빠서 한 달을 쉬었다. 근무시간을 확인해 봤더니 498시간이었다. 주말 없이, 한 일주일 정도는 거의 매일을 밤샘으로 보내면 자연스럽게 채우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말 들숨과 날숨이 헷갈린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생각할 겨를도 없다.



'회원님, 오랜만이시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오랜만에 본 강사님께서 수업이 끝나고 안무를 물으셨다. 그렇게 다정한 사람들 앞에서 나는 뚝딱거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히 어색하고 쭈뼛대는 게 다반사다.

 

'아.. 일이 많아서 한동안 쉬었어요'

'오늘 수업은 괜찮으셨어요?'

'네. 항상...'


 좋아요,  듣고 있습니다, 그런 뒷말을 단정하게 끝맺지 못하고 바보처럼 말줄임표로 웃었다. 평소에는 한 ㄴ 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상황에는  부러지게 말을 못 하나 싶다. 한심해 보이지 않았을까. 탈의실 라커 문을 열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좋았다.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나의 부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꾀나 고마운 위로가 된다. 남은  달도 열심히 할게요 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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