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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비또바 Dec 23. 2020

꽃을 세는 단위가 송이라서 좋다

 꽃 선물이 좋아진 건 첫 연애를 시작하고부터다. 그전까지는 쓸 데도 없고 사흘만 지나면 금세 시들해지는 걸 왜 주고받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건 그 무용함과 찰나성이다. 무엇의 유용한 도구가 아닌 목적 그 자체.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좋다는 셈하지 않는 마음. 그래서 특별한 기념일이 아닌 보통날에 꽃을 선물하는 건 꾸준히 간직한 연애 로망이다.


 이번에 만드는 꽃바구니는 외할머니를 드리기 위해서다. 외할머니는 세 달 전 담낭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다. 처음에 몇 주 조차도 쉽게 기약하지 못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할머니 앞에서 울지 말자고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건 또한 엄마 자신과의 다짐이었다. 울음을 참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던 그때의 무력감은 정말 끔찍하다.


 지금은 다행히 계속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다.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데에도 가고 싶지만 그것까지는 아직 욕심이고 사치다. 더욱이 코로나로 인해 더 많은 것들이 쉽게 어려워졌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꽃이다. 한 해도 빠짐없이 옥상이나 집 앞 화단에 항상 꽃을 기르시던 외할머니께 꽃을 선물해드리면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미 예쁜 꽃.

 일상에서는 생각보다 꽃을 볼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인지 화병에 준비된 꽃을 보자마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시작 전부터 마음이 들떴다.


 먼저 시선의 중심이 될 크고 화려한 꽃송이 위주로 플로랄 폼에 꽂았다. 오아시스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촉촉한 스펀지에 약 2센티미터 정도 깊이로 꽂아야 하는데, 줄기를 자를 때 그 길이까지 잘 계산해야 한다. 기둥은 물을 빨아들이는 표면적이 좀 더 넓어지도록 사선으로 잘랐다.


한 단계씩 꽃을 꽂는 게 마치 그림 그리는 것 같다.


 센터 중 하나는 가시 없는 장미로 알려진 '딥실버'(인 것 같)다. 외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장미라서 딱 안성맞춤이었다. 장미에도 종류가 무척 많다. 모양만 보면 이리스카 장미인가 싶기도 한데 플로리스트 분께서 '가시 없는 장미'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나서 검색해보니 개중에 딥실버와 가장 흡사해 보였다.


 딥실버는 국내에서 개발하여 해외에 로열티를 받고 수출하는 효자품종이라고 한다. 탐스러운 꽃송이에 흰색과 분홍색, 그리고 옅은 초록빛이 살짝 오묘하게 섞여 참 예쁘다. 게다가 가시가 없어 유통이 편리하고 저온과 병충해에 강한 데다 재배시기가 짧다고 하니 말 다했다. 나보다 효자다.


오른쪽에 놓인 잎이 은엽아카시아.

 나머지 빈 공간도 서로 다른 꽃들로 차근차근 메운다. 꽃송이의 방향이나 높이가 제각기 다를수록 좀 더 풍성하게 예뻐 보인다고 했다. 노란 백합, 하얀 카네이션, 하늘색 미니 델피늄 등등... 그중에서도 나는 은엽아카시아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원래 노란 꽃이 피는데 이번에는 꽃 말고 잎가지만 사용했다. 군데군데 꽃 틈 사이에 꽂았더니 가냘픈 라인의 은백색 잎이 다른 화려한 꽃보다도 묵묵해 보여서 좋았다.


 꽃바구니는 시작할 때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완성됐다. 꽃꽂이를 단순하게는 브리티시 스타일과 프렌치 스타일 둘로 나눈다고 한다. 브리티시 스타일은 정돈된 정원처럼 단정하고 정제된 모양과 균형이 특징이다. 프렌치 스타일은 브리티시 스타일보다 좀 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꽃 선택의 폭이 비교적 넓다. 전자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후자는 <퐁네프의 연인들>같다.


 예시 사진을 보면서 나는 브리티시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프렌치 스타일에 가까웠다. 가지런한 돔 형태보다도 긴 꽃이 군데군데에 삐죽 튀어나와 리듬감을 주는 게 더 재미있었다. 은엽아카시아같은 풀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그랬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재의 나는 사뭇 다르다.


 꽃바구니를 보니 자꾸만 함박 미소가 나왔다. 꽃을 세는 단위가 송이라니. 한 번도 좋아해 본 적 없는 ‘송이라는  이름이 새삼 좋아진다. 이런 꽃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면 아침에  뜨자마자 기분이 좋겠지. 꽃은 외할머니한테 직접 드리지는 못했다. 대신 나중에 전화를 드렸는데 외할머니는 가시 없는 장미 이야기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엄마한테 잠깐 얘기했던  전해 들으셨나 보다.


"할머니. 스펀지를 살짝 벌려서 물을 천천히 주면 되는데요. 꽃이 빼곡해서 어려우실 수도 있어요."

"그럼 스펀지 채로 밤새 물에 담가 두지."

"네. 근데 할머니. 시들면 아까워하지 마시고 바로 버리세요. 제가 또 만들어드릴게요."

"그래 그래."


 다음에는 좀 더 오래가는 꽃병으로 선물해드려야겠다. 예쁜 봄 꽃송이들로 한아름 채워서 드릴 거다. 실은 꽃병보다도 외할머니랑 함께 꽃을 보러 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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