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한국 소설에 빠져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주로 김애란님, 박민규님, 신경숙님의 소설을 봤지요. 당시만 해도 대학가 주변에 헌 책방이 두 군데 정도 있었습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친구가 헌책방에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친구가 그날 제게 책 한권을 사서 선물했는데, 그것이 제가 한국문학에 빠져 지냈던 계기였습니다.
그 이후로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취업준비, 취업까지 쉴틈없는 20대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와 함께 책에서도 한참 멀어져서 지냈지요. 그러나 언제고 다시 읽겠다는, 다시 책을 가까이 하며 살겠다는 다짐이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주 가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도서관을 거닐며 어느 책장에 어떤 책들이 있는지 구경하는 맛이 있는데요. 한국문학 쪽 서재의 위에서 두번째 칸이 모조리 박완서 전집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아이 다섯을 키우고 40줄에 등단한 작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글쓰기를 놓지 않은 작가. 두번째 칸을 가득 채운 전집에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요.
주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쓰인 장편소설들을 읽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상을 디테일하게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박완서님 소설에 그려진 과거의 한국사회는 지금과 참 다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번 생각합니다.
'우와, 이 땐 이랬다고? 이게 통념이었다고?'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는 미혼이지만 임신한 여교사를 둘러싼 당시의 사회적 시선이 그려집니다. 퇴직을 종용하는 교장선생님과 이를 문제 삼는 학부모들,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 동네를 떠나는 주인공까지. <서 있는 여자>에서는 당시 결혼한 여자의 직업이 얼마나 하찮게 취급 받았는지가 드러납니다. 기자라는 직업을 좋아해서 그만 두고 싶지 않은 주인공과, 결혼했으면 주부로서 집안 살림을 돌보라는 주변의 압박이 그려집니다.
박완서님 장편소설에 그려진 한국사회와 2020년대인 지금을 비교하자면, 통념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나 봅니다. 지금은 '응당 이래야지.'하는 것들도 십년 후, 혹은 이십년 후에는 전혀 보편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게 될 수도요. 한 살 한 살 나이는 먹지만 유연하고 열린 자세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무엇보다 박완서님의 등단과 그 이후의 활동이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아이 다섯을 키우고 40줄에 등단하여 한국 문학의 거장이 된 작가. 당시 40이라는 나이는 요즘의 40보다도 사회적으로 나이들었다고 인식되지 않았을까요. 그 시절 40살에 새로운 도전을 한 박완서님의 삶이 큰 감명을 줍니다. 새로운 일, 새로운 도전에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걸지도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내 나이가 몇 일지라도, 아이들이 있더라도 시도해보는 것도 갚진 경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