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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리 Mar 28. 2023

결국엔 익숙한 그 맛, 노란 카레

제가 어릴 적, 카레는 무조건 노란 카레였습니다. 집에는 늘 오뚜기 카레가 있었습니다. 순한맛, 약간매운맛, 매운맛의 선택지만 있었을 뿐이지요. 엄마는 늘 약간매운맛을 구매했었습니다. 엄마가 워킹맘이었던 지라, 카레는 제 어릴 적 단골메뉴였습니다. 카레랑 미역국이 맞벌이 식탁의 국룰인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한 솥 끓인 카레랑 미역국만 있으면 바빠서 밥 굶을 일은 없으니까요.



노란 가루형 카레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저는 고등학생 때 신문물을 접합니다. 바로 고체형 일본 카레. 고등학교 2학년 때 제가 소속되어 있던 봉사단에서 일본 규슈지역으로 단체 여행을 갔습니다. 여행 마지막날 관광버스가 쇼핑하는 곳에 들렀습니다. 조그만 동전지갑에 남은 엔화 지폐와 동전을 가지고 뭘 사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어렵사리 골랐던 것은 일본 고체 카레 두 개. 일본어를 잘 몰라서 일단 매운맛, 순한맛으로 보이는 빨간색 한 박스, 초록색 한 박스를 골랐습니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일본 카레 사 왔다고 내밀었습니다. 그날 저녁은 바로 카레를 먹었는데, 이게 웬 걸. 노란 카레에서는 맛볼 수 없는 부드럽고 크리미한 맛이 느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18살 제 생애에 이전에는 없던 맛이었습니다. 마치 어린이가 처음으로 콜라를 마신 기분이랄까. 저는 엄마에게, "엄마 오뚜기 카레보다 일본 카레가 훨씬 맛있어!"라며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왜 두 개만 사 왔지 다섯 개는 사 올걸 하면서요.



그 이후로 우리나라에도 점차 일본 고체카레들이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카레 전문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10대 시절 저의 신세계는 그저 쉽게 접할 수 있는 흔한 맛이 되었습니다. 역시 내 입맛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를 만날 때에도, 데이트를 할 때에도 일본 카레 파는 식당에서 돈까스커리도 먹고, 고로케커리도 먹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우리나라 식품업체들에서도 일본 카레 같은 제품을 직접 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정원 카레여왕이라던지, 오뚜기 3일 숙성 카레라던지. 노란카레가 아니라 갈색카레를 집에서도 손쉽게 해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요즘의 제 입맛은 결국 오뚜기 노란 카레입니다. (오뚜기로부터 그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릴 때 먹던 음식이 그렇게 생각난다던데, 제가 딱 그렇습니다. 일을 하다가 문득 생각납니다.

'카레가 먹고 싶다. 살짝 매운 듯 노란 카레.'

그런 날이면 퇴근 후 카레를 먹습니다. 다행히 맞벌이인지라 집에는 거의 늘 노란 카레가 있습니다. 노란 카레가 없다면 미역국이 한 솥 있습니다. 워킹맘이었던 엄마의 메뉴 역사를 제가 워킹맘이 되어 되풀이하는 중입니다.



시간이 좀 있다면 돈가스를 튀겨 올려 먹기도 하고, 귀찮으면 계란프라이만 곁들여 먹습니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습니다. 갈색 카레가 채워주지 못하는 그 2%를 노란 카레가 꽈악 채워줍니다. 입맛이란 어쩌면 기억보다도 더 선명합니다. 어릴 적부터 먹던 그 익숙한 맛, 혀에 촘촘히 박힌 미뢰가 기억하는 맛입니다. 어린 시절 입맛은 그냥 몸이 기억하는 것일 수도요.



지난 일요일에는 남편까지 합세했습니다. 갓 지은 현미밥에 냉장고에 있던 카레 듬뿍, 이마트에서 1+1 할 때 쟁여두었던 돈가스까지 튀겨 얹었습니다. 아쉬우니 삶은 달걀도 반 갈라 넣구요. 삶은 달걀이 반숙이었으면 완벽했겠으나, 집밥의 묘미는 완벽하지 않음에 있지요. 일요일 해 질 무렵부터 슬금슬금 다가오던 우울한 마음을 노란 카레로 위로했습니다. 이 이정도면 노란카레, 제 소울푸드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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