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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리 Oct 11. 2022

좋은 제도들도 눈칫밥을 먹으면요...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내가 근무했던 부서는 50대가 주류일 만큼 유독 연령층이 높았다. 나는 당시 20대의 젊은 처자(?)였고, 나 빼고 다 50대인 조직에서 임신을 알리기란 꽤나 부담스러웠다. 용기를 내어 임신을 알리자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더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딸이냐, 아들이냐." "남편이 좋아하지?" "시부모님은 뭐라셔?" 등등. 따분한 50대의 직장생활에 나의 임신은 즐거운 화두가 되었다.



그때 그 시절

한껏 들뜬 축하를 받은 이후는 어린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했던 여자 과장, 차장님들의 회고가 시작되었다.

"요즘은 육아휴직이 얼마나 되? 우리 때는 육아휴직이 어딨어. 1~2개월 쉬고 다시 나와서 일했어."

"대부분 만삭 때까지 일하느라 일하다가 진통 와서 애 낳으러 갔다니깐."

강한 자만 살아남았다던 1990년대. 그 시절의 간증이었다. 가히 매운맛이다. 그리고 차장님은 덧붙였다. "그 핏덩이를 두고 회사에 나오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굳이 그렇게 빨리 다시 일했어야 하나 싶어. 그때는 대충 몸조리만 하고 빨리 나오는 분위기여서 나도 그렇게 했지."

그놈의 분위기. 직장생활에서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 살피며 눈치 보는 것은 매한가지다. 직장 분위기에 맞추느라 갓 태어난 가장 소중한 아기와의 시간을 포기했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요즘은 육아휴직 1년 정도는 대부분 사용하는 분위기라 정말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도의 수혜자와 피해자

입사 동기끼리 저녁을 먹은 날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K언니는 씩씩대며 이야기했다.

"야 우리 팀에 L대리 있잖아. 자기 임신했다고 2시간 단축 근무해서 하루 6시간만 근무하겠다는거야. 말이 되냐. 일은 넘치는데."

나는 당시 임산부가 아니었지만 K언니의 씩씩거림을 보며,

'내가 나중에 임신하더라도 팀원들한테 욕먹을까 봐 절대 단축근무는 못하겠다.'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아이 낳기 힘든 사회구나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K언니의 씩씩거림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L대리가 단축 근무하는 만큼 그 팀의 막내인 K언니의 업무는 늘어날 것이기에.


임신 중 단축근무, 육아기 단축근무, 임신 중 검진휴가, 가족돌봄휴가 등은 실제로 사용하면 숨통이 트일 만한 좋은 제도들이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면 내 옆 팀원들의 업무가 과중되는 구조에서는 차마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서 쓸 수가 없다. 실제로 나는 저 위의 네 가지 제도 중 단 한 개도 쓴 적이 없다.


임신 및 육아 당사자가 제도를 사용하면 그 부담을 오롯이 옆 사람들이 지게 되는 구조가 개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는 제도의 수혜자가 있으면 제도의 피해자 역시 생기는 구조다. 물론 이러한 개선은 쉽지 않아 보인다. 팀마다 팀원 구하려고 난리지만 인사팀에서는 매번 안 된다는 대답만 하니깐. 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업무 공백은 오롯이 그 팀이 짊어져야 한다. 나의 공백이 옆사람의 부담이 됨을 알기에, 임산부와 워킹맘들은 자꾸 팀원들에게 미안해진다.



임신과 육아가 직장에 피해가 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란다. 엄마들이 옆 팀원들에게 미안해하며 직장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깨 펴고 당당하게 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육아휴직 사용이 보편화된 것처럼, 언젠가는 그리 되리라 믿는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 나의 삶이 있다. 전국의 수많은 일하는 엄마들의 삶이 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회사로 내딛는 엄마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시발점이 되어, 비로소 좋은 제도를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받으며 사용할 날이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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