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층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그녀. 바로 나다. 작년 어느 날 자리에 있다가 물을 뜨러 멀리 있는 정수기에 가는데 옆팀 동료가 말했다. "뚜리님은 걸음이 엄청 빠르네. 뭐 급한 일 있어?" 당황했다. 나는 내 걸음이 빠른지 몰랐다! 그저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는 줄 알았다. 다른 동료들의 걸음걸이를 살폈다. 느긋하게 설렁설렁 걷는 K팀장.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서서히 지나가는 M사원. 세 걸음 걷다 이 팀 가서 수다 덜고, 네 걸음 걷다 저 팀 가서 수다 떠는 핵인싸 L선임. 그렇다면 나는? 쿵쿵쿵쿵 앞만 보고 전진할 뿐이다. 마치 전사처럼.
언제부터였던가?
동료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았다. 내 걸음이 언제부터 빨랐지? 아마도 둘째 육아휴직 후 복직한 때부터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아이 둘의 등원 준비를 하며, 출근 준비를 하는 시간은 긴장감의 최고조이다. 집을 나서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 안에 아이들 밥도 먹이고 구슬려서 옷도 입혀야 한다. 그리고는 버릴 쓰레기와 아이들 등원 가방 내 출근 가방까지 바리바리 싸서 집을 나선다. 아이들을 사옥에 있는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나는 12층으로 올라온다. 내 자리에서 길게 숨 한번 쉬어내지만, 그 긴장감이 여전히 몸과 정신을 지배한다. 그 긴장감으로 내 걸음은 빨라진다.
일하는 엄마의 일하는 일상
회사에서 일을 한다. 숫자를 보느라 눈이 빠질 것 같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 실수를 할 수 있어 화장실 가는 것도 미룬다. 중간에 키즈노트 알림이 울린다. 오후 3시경이니 아마 어린이집에서 보낸 오늘의 알림장 내용일 것이다. 아이가 오늘 어떻게 생활했는지 적혀 있어 휴대폰을 열어서 읽고 싶다. 그러나 알림장 읽기는 뒤로 미룬다. 정시퇴근을 하려면 근무 시간에는 오로지 일에 집중해야 한다. 내 모니터 밑에 놓여있는 시곗바늘이 점점 6시에 가까워진다. 약간 마음이 초조해지면서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이 떠오른다. 아이들 밥 먹이기, 목욕시키기, 어린이집 가방 싸기 등등. 생각은 저 멀리 치워버리고 오늘 해야 할 업무 중 처리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 최종 체크한다. 다행히 정시퇴근! 퇴근하는 발걸음은 사무실에서의 발걸음보다 더 빠르다. 사무실에서의 발걸음이 쿵쿵쿵이면 퇴근하는 발걸음은 우두두두. 마치 미사일 같다고나 할까.
아이를 낳기 전에는 적당히 쉬엄쉬엄 일을 했다. 굳이 꼭 정시퇴근을 고집해야 하지는 않으니깐. 정시퇴근하지 못해도 내 몸만 조금 피곤하면 되니깐. 아마 그때는 회사에서의 내 걸음에도 꽤나 여유라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쉬엄쉬엄 했다가 퇴근이 늦어지면 여파가 크다.
덕분에 아주 고효율로 일을 하고 있다. 최대한 효율적이고 동시에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생각한다. 기존 업무처리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새로운 방식이 더 시간도 적게 들고 정확도에도 문제가 없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한다. 그중 몇 가지는 칭찬도 받았다. 내가 바꾼 업무처리방식이 협업하는 입장에서도 꽤나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선처럼 걸을 날을 기대하며
그래서 나는 쿵쿵쿵 물 뜨러 가고, 우두두두 퇴근하는 12층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그녀가 되었다. 작년보다는 올해 조금은 걸음이 느려진 것 같다. 그 이유는 둘째가 돌쟁이였던 작년은 육아가 매우 매운맛이었으나, 둘째가 두 돌이 넘은 올해는 육아가 약간 순한맛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과도 종종 말한다. "이제 육아만 보면 우리가 가장 힘든 시기는 이미 겪어낸 것 같아."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엄마 찾지 않을 나이가 되면, 나도 신선처럼 설렁설렁 걸어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