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맞는 옷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새 직장 2개월 차, 마케터를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몇 주전,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지인의 집에 놀러 갔다가 술자리 게임으로 추천한다는 식으로 적혀있었던 스무고개 카드게임을 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카드를 뽑으면 다른 사람들이 스무고개 형태로 질문을 던지며 정답을 맞히는 게임이었다. 첫 번째로 카드를 집어 들었고 질문은 '학창 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무엇이었나요?'.
"사무직이야 서비스직이야?"
"현실에 가까운 일이야 가상에 가까운 일이야?"
의외로 어렵게 빙빙 도는 질문만 나와서 "글을 쓰는 직업이야"라고 힌트를 줘도 십여분째 정답과 가까워지지 못했다. 왜 일하는 장소가 어디냐고는 묻지 않지? 알면 단번에 맞출 텐데.
힌트를 거의 정답처럼 주고 나서야 나온 학창 시절 장래희망은 '방송작가'다. 정확히는 예능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고 글쓰기(그 당시에는 글짓기라는 어감이 더 결이 맞다)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도 학원/과외 중 글짓기 과외를, 수업시간은 국어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특히 국어 선생님께 어떻게든 사랑받으려고 교무실도 찾아가고 집중하고 있다는 티를 내려고 텔레파시도 무진장 보냈던 것 같다. 물론 선생님은 집중은 항상 잘하는데 왜 성적은 아쉬운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잘 쓴다-잘 쓴다-' 칭찬을 받고 대회에 나가면 곧잘 상을 받는 글쓰기는 그때 당시 자칭 강점이었다.
나중에 커리어를 쌓으면서 알아차린 것이었는데 대학생 시절 관광마케팅 교수님이 생각을 글로 꺼내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마케터를 추천했는데 그건 마케팅 교수님이어서 그렇지 마케터가 아니라 작가를 추천받았어야 했다. 이래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한 거다. 그 교수님의 영업 때문에 어딘지 방향이 잘못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실제로 첫 직장부터 지금까지 쭉 마케팅 영역에 있다. 항상 기획자 아니면 마케터다.
다행인 것은 마케터에게도 글쓰기는 항상 필요한 부분이다. SNS 채널 운영자로서 매일 카피를 써야 했고, 브랜드 스토리를 기획하거나 서포터즈분들께 보낼 메일을 작성할 때도 결국 글쓰기다.
마케팅이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타이핑을 치는 순간들이 커리어를 연장시켜줬다.
그렇게 어느덧 4년 차, 플랫폼 회사의 마케터로 출근하고 있다. 회사와 상사의 이슈로 프로야근러가 되어 스트레스란 스트레스는 다 받고 있다. 매일 실수를 하고 정신없이 일을 쳐내는 하루하루인데 이런 와중에도 입사 한 달 반 만에 인정받은 것은 글쓰기. 팀장님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말랑말랑하게 글 쓰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저도 글 쓰는 일을 할 때만 재미있어요 팀장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잘 삼켰다.
전 직장 팀장님도 같은 의미의 말을 하셨다. 팀장님께서 이직하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팀원 한 명 한 명 언급하며 단톡방에 글을 남기셨다.
'막내의 톡톡 튀는 카피라이팅이 인상적이었어요. 잘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입사 이틀 차부터 두 달 차까지 야근에 정신없는 회사 생활을 하니 벌써 번아웃이 찾아왔다. 매일 마음속에 사직서를 품고 출근하지만, 글을 쓰는 업무들만큼은 더 잘하고 싶다.
여느 때와 같이 야근하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마케팅을 하는 게 맞을까.'
그래도 마케터는 꽤 맞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SNS도 개인 채널들을 운영하고 있으니 익숙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에도 관심이 많으니 몸에 착 감기는 '어머 이건 사야 해!'정도의 옷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입기에는 무난한 옷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재 회사를 다니면서 점차 강하게 드는 생각은 사이즈는 맞지만 기장이 짧아 입을 때마다 신경 쓰이는 상의 같다.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그 '좋아하는 마음'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글 쓰는 직업에 계속 미련이 있는 채로 앞으로의 커리어를 쌓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작가는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처럼 충분히 사이드 프로젝트로 할 수 있지만, 메인으로 가져가고 싶기도 하다. 왜 가장 좋아하는 게 서브가 되어야 할까. 드라마 보면 서브 남주는 항상 아련하고 슬프던데 현재의 글쓰기가 딱 그 꼴이다.
이런 고민에도 쉽게 관두지 못하는 이유는 역시 현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 옮겼는데 별로면 어쩌나-하는 불안감,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꿈을 잊지 않는다면, 포기한 게 아니에요'
사십 대에 작가의 꿈을 이룬 정유정 작가님의 이야기를 최근 매스컴을 통해 들었다. 이제 막 나에게 맞는 옷은 글 쓰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고 이 글을 마무리 짓는 지금도 갈팡질팡이다.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에서 내가 가장 편안해하는 옷을 입을 수 있을지 고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