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물건의 고마움!!
작년 이맘때 20년 된 냉장고를 처분했다.
혼수로 장만한 양문형 백색 냉장고.
20년이 돼 색은 바래고 손때도 묻고, 한쪽 문은 꽉 밀어 닫아야 하는 낡은 냉장고였다.
고장은 나지 않았지만 언제 멈추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래 써서 불안한 마음에 교체했다.
우리 가족의 의지보다는 갑자기 멈출까 봐 걱정이 앞선 시어머니의 의지가 더 강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 6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냉장고가 멈춰 있었다.
딸아이가 새벽에 얼음을 꺼내면서 문이 살짝 안 닫혔던 게 그 사달의 이유였다.
내용물을 다 꺼내 김치냉장고로 옮기고, 일부는 음식물 쓰레기로 버렸다. 텅 빈 냉장고를 보며 인터넷 폭풍 검색 후 새로 살 냉장고를 선택했다. 그날 저녁 남편이 혹시나 해서 켰더니 신기하게도 다시 작동됐다.
잘 돌아가니 또 바꿀 생각이 없어진 우리 부부.
하지만 냉장고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가 돈까지 보내주시며 당장 냉장고를 바꾸라고 하셔서 더 쓸 수 있었던 냉장고를 바꿨다.
사실 우리 집 냉장고만큼 오래된 냉장고를 주위에서 보지 못했다. 언니네 집에라도 갔다 온 날이면 냉장고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하지만 몇 년 전 한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친하게 지내는 한 선배가 15년 이상 된 차가 고장이 나서 폐차를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갑자기 멈춰 엄청 위험한 일을 겪고 그 차가 꼴도 보기 싫었단다. 그런데 폐차를 하기 위해 차를 견인해 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며 오랜 친구가 떠나가는 것처럼 헤어지는 게 슬펐다는 것이다.
"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차에 그렇게까지 감정 이입을 해야 할 일인가.
그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주방에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는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선배의 자동차 같은 그런 존재구나 싶은 생각에 낡은 냉장고가 달리 보였다. 자동차나 가전제품이라 할지라도 세월이 지나면 애틋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신혼 때부터 함께하고 아이들이 태어나 커가면서 우리 가족과 늘 함께한 냉장고.
'조금만 더 쓰지 뭐', '20년은 써야지' 하며 몇 년 더 사용했다.
"냉장고야 힘내"
아이들과 우스갯소리를 하며 고장 나지 않기를 바랐고, 내장고는 응답이라도 하듯이 20년을 버텨주었다.
한 때 '오늘의 집'에 나오는 깔끔하고 트렌드한 물건들로 인테리어를 하는 게 즐거움이었다. 이사를 다니며 리모델링을 두 번이나 하고 할 때마다 우리 집 추구미에 맞는 가구며 소품들을 사곤 했다. 당시엔 낡은 물건들이 구질구질해서 싫었고 30년이나 된 재단가위를 계속 쓰는 엄마도 이해가 안 됐다.
"이 정도 썼으면 그냥 버리지, 뭘 이렇게까지 오래 써?"라고 물었더니
"아직도 튼튼하고 잘 되는데 왜 버려~"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그 가위를 집어 들던 엄마.
이젠 새로 사는 것보다 망가지지 않게 오래 쓰는 게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안다. 낡으면 낡은 대로 그 멋스러움이 있다. 30년이 훌쩍 넘은 재단 가위를 버리지도 않고 갈고닦고 한결같이 사용하는 엄마도 멋있고 낡디 낡은 재단가위 그 자체도 장인처럼 느껴졌다. 결혼과 함께 언제나 주방에서 음식을 내어준 우리 집 반려 냉장고처럼.
파스텔톤의 문이 네 개인 새 냉장고가 정이 들어가고 있다. 1년이 지나니 이젠 우리 집 냉장고 같다. 우리 집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냉장고.
이런 감정은 전염된다.
남편은 8년이 된 차가 불만이어서 차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선배의 폐차 이야기를 들려주니 처음에는 남편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니 8년 된 우리 차에 고마움이 느껴진단다. 차가 발이 되어 여기저기 데려다주고, 아이들이랑 우리 가족 안전하게 지켜줘 정이 들었단다. 이런 말을 하는 남편이 쪼금 멋있어 보이면서 나랑 닮았다는 생각에 혼자 웃었다. 남편은 10년째 같은 차를 타는 중이다.
얼마 전 둘째에게 한쪽이 떨어진 수영 백팩을 새로 사주겠다고 했다. "새것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 오래 쓰는 게 좋고 돈도 아끼는 거지"라며 쓸 수 있을 때까지 쓰겠다는 것이다. 오늘도 아빠가 꿰매 주신 가방을 메고 수영장엘 갔다. 초등학교 5학년 꼬맹이의 뒷모습이 귀엽다. 그 모습에 또 혼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