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나의 일상

여름날 열일했던 열무김치

소중하고 든든한 어머니표 김치

by LYR

지난여름 초 어머니댁에서 열무김치를 받아왔다.

금세 다 먹고 더 부탁드렸더니 전 보다 훨씬 많은 한통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뜨거운 여름 열무김치는 별미였다.

국수를 집에서 해 먹는 건 일 년에 한 번도 채 되지 않았지만 올여름에는 여러 번 열무국수를 해 먹었다.

국수뿐만 아니라 특별한 반찬이 없으면 계란 하나 구워서 열무를 넣고 고추장으로 쓱쓱 비빈 비빔밥도 자주 차려줬다. 쫄깃쫄깃 잘 삶아진 국수를 그릇에 담아 냉면육수와 열무 국물로 간단하게 육수를 준비했다. 그 위에 삶은 계란과 오이를 올린 열무 국수는 비빔밥과 더불어 덥고 지친 여름에 한 끼로 최고였다.


작년부터 열무의 맛을 어떻게 알았는지 딸아이가 열무가 맛있다고 해서 시어머니가 올해도 잊지 않고 열무김치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여러 번 해주는 열무 메뉴에도 입맛 까다로운 딸아이는 투덜거리지 않았다.


나도 올해 들어 열무김치의 맛을 알게 됐다.

그전까지 열무뿐만 아니라 김치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김치는 ‘부담’이었다.

40년이 지난 후 부담은 많이 줄어들었고 대신 그 자리를 든든함이 채워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맵고 짠 음식을 유난히 사랑하는 경상도 분이시다.

익은 김치는 입에도 안 대시는 아빠를 위해 쉽게 익지 않게 김치는 무조건 짜게 담갔다.

매운 것도, 짠 것도 잘 못 먹고 싫어했던 나는

김치 이외엔 특별한 반찬이 없을 때는 그냥 흰 밥만 먹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학식을 먹을 때도, 회사 점심시간 식당에서도 김치를 먹은 날은 손꼽았다.

요즘도 식당에서 김치를 잘 먹지는 않는다.


그런 나에게 결혼과 함께 김치 쓰나미가 몰려왔다.

김치를 왜 그렇게 많이 담가 주시는지, 왜 그렇게 종류별로 담그시는지,

두식구가 사는 집에 어머니는 어머니의 마음만큼 김치를 수북이 보내셨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부추김치, 아마 열무김치도 있었을 것이다.


많이 안 주셔도 된다고 해도 그렇게 김치를 많이 주셨다. 냉장고에 반 이상이 김치였다.


시어머니는 김치를 정말 맛있게 담그신다.

친정엄마와 언니들도 어머니의 김치 맛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 맛있는 김치를 아들과 며느리에게 듬뿍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김치는 나에게 먹어야 하는 부담과 의무였다. 김치를 먹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큰 통에 담긴 김치 한 포기를 꺼내 썰고 작은 통에 담고 일부만 반찬으로 작은 그릇에 담아야 한다. 꺼내서 담고, 썰고, 썰면서 김치물이 튀고, 그럼 싱크대도 행주도 빨갛게 물이 들고 닦고 또 빨아야 하니 그게 싫었다.


김치를 듬뿍 주셔야 마음이 든든한 어머니와 김치가 부담인 며느리는 늘 김치로 실랑이를 했다.

김치 냉장고가 없어서 더 못 가져간다고 하니 어머니가 김치 냉장고를 사주셨다.

김치를 많이 먹지 않는 우리 집은 다음 해 가을까지 김치가 늘 김치 냉장고 남아 있었다. 김치 냉장고에서 아주 오래 숙성된 김치는 조용히 음식물 쓰레기로 버린 적도 많았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작년부터 엄마는 김치를 아주 조금만 담그셔서 이젠 엄마의 김치를 맛볼 수가 없어졌다. 그 순간 어머니의 김치가 너무 소중해졌다. 엄마도 어머니도 겨울이 되기 전에 김치를 보내주셔서 당연히 받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당연함이 당연함이 아닌 걸 알았다.


작년 김장김치부터는 김치의 소중함을 알게 되니 김치가 더 맛있었다. 묵은지 김치찜을 그렇게 해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여름이 오기 전에 김치를 다 먹었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놀라시며 남은 김치를 싸 주셨다.


여전히 김치를 많이 먹지는 않지만 그래도 김치가 있어야지 볶아 먹든 끓여 먹든 찜을 해 먹든 뭐라도 할 수 있어 냉장고에 김치가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다.


열무김치는 없지만 오늘 국수를 해 먹어야겠다. 여름철 별미로 딸아이의 입맛을 사로잡은 열무 대신 멸치육수를 우려내 잔치국수를 해줘야겠다. 비 오는 날 해 먹는 잔치국수. 그 잔치국수도 맛있게 먹으면 좋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시절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