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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박은 무죄

by 여름나무

“당다당 당당 딩 댕댕~!

슈베르트의 송어다.

베란다 한 편에서 건조기의 긴 연주가 끝났다.

“탁!” 문이 열렸다.


거실 한복판에 건조기가 토해 놓은 뜨끈한 빨래가 수북하다.

여기저기 대충 널어 훈기를 뺀다.

두어 시간쯤 지났다.

빨래를 개킨다.

똑바로!

아니 대충대충..!

다시 차분히 수건의 각을 맞춰 꼼꼼히 정렬시킨다.

‘암! 그래야지. 휴~!’


나는 지독한 강박증 환자다.

부모님 두 분이 AA 혈액을 물려주신 덕분에 ‘소문자 트리플 a 뒤끝 5만 년’이라는 좀스럽고 예민한 혈액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까칠과 소심함은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권에서 2등은 안 한다.

나의 이런 내면세계는 자타가 공인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릴 때 엄마는 간식거리를 꼭 까까통에 넣어 주셨다.

과자봉지가 비뚤어지게 뜯어지면 똑바로, 나란하게 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고, 확인까지 하는 주도면밀한 아이였다.

가위와 사인펜과 자까지 사용하다가 지친 엄마는 급기야 누레진 플라스틱 반찬통을 내 까까통으로 던져주셨다.

강박으로 조롱과 구박을 받았던 나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아니 갈고 싶었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칼을 무서워했던 나는 일찌감치 복수의 칼은 접어야 했고, 대신 막연한 앙심을 품은 채로 소심한 복수만을 꿈꿨다. 꿈은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박쟁이 소심한 꼬맹이는 어느덧 열두 살이 되었다.

방학이 다가오면 누구나 그렸던 동그라미 계획표.

스케치북 정중앙(정확한 지점을 찾으려 오만짓을 다 했다.)에 오빠의 컴퍼스 뾰족한 쪽을 꾸욱 누르고 한 바퀴 돌려 동그라미를 그렸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얼추 몇십 개는 그린 거 같다.

끙끙대는 나를 안타깝게 보시던 아빠는 냄비뚜껑을 가져오셨다.

‘아 자존심 상해!’


더욱 기막힌 일화가 많지만 나의 이미지에 먹칠이 될까 봐 이쯤에서 예시는 마무리하는 걸로.

아무튼 아빠는 본인도 뵌 적 없는 고조할아버지를 내가 딱 닮았다고 푸념을 하셨다.

‘고조할아버지면... 언제야?’ 때는 1870년쯤.

네이버에 물어보니 흥선대원군 할아버지가 실각하고 선진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때라고 되어있다.

고조할아버지는 조선 최고의 강박증 환자셨나 보다.

아빠의 고증에 의하면 밥상의 그릇들도 정확한 간격으로 있어야 했고, 댓돌 위의 신발도 엄격한 규칙으로 놓였다고 한다.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내가 고조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건 맞는 거 같다.


하지만 나는 달라지고 있다.

멍하니 있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

요즘은 소파에 벌러덩 누운 채로 스르륵 졸기도 한다.

시간 체크하는 습관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릴렉스하며 살아지는 게 신기할 정도다.


어릴 때는 시간이 멈춘 거 아닐까? 생각을 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50대인 지금은 일주일이 월수금만 있는 거 같다.

시간이 스치듯 지나가고 있다.

흐릿해진 기억과 빠른 세월은 강박 때문에 생겨난 나의 복수심을 무디게 만들었다.

점점 내려놓게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해진다.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나의 강박은 아직 진행 중이다.

강박을 없애려는 것도 강박이겠지...


또다시.. 릴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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