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겨울, 그리고 봄

by 여름나무

1989년 12월.

솜털 뽀송한 스무 살.

연습실의 부실한 미닫이 유리창으로 겨울의 앙상한 칼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비집고 들어온다.

김밥과 바나나 우유로 점심을 때우고,

자판기의 율무차로 허기진 심기를 달래는 중이다.

지난여름의 화려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지금은 초라하게 말라비틀어진 담쟁이넝쿨만이 예술관 건물 벽을 힘겹게 부여잡고 있다.


“꼬맹이!”

음대 최고의 골초다.

“네~선배님! 안녕하세요?”

“니네 미팅하자!”

반달눈을 하며 수줍은 척했다.


곧 크리스마스다.

우리는 탈출을 시도했고, 물론 성공했다.

종각 뒤편에 선샤인이라는 적당히 촌스러운 이름의 이쁜 카페가 있었다.

미팅시간은 금요일 오후 5시.

교수님 눈치를 봐가며 별의별 사정을 만들어 시간을 맞췄다.

한 친구는 건강히 잘 계시는 할아버지를 주님의 품으로 훅! 보내드렸다. 아멘!

난 가만히 앉아 있어도 아파 보이는 허약체질이어서 고개만 떨구고 있는 걸로 쉽게 통과했다.

나머지 두 친구의 알리바이는 기억에 없지만, 누가 봐도 스무 살의 발그레한 이유로 시간을 만들었던 거 같다.

드디어 미팅날이 되었다.

나름 때 빼고 광낸 4학년 머스마들이었다.

처음엔 너무 어색했지만 조금 지나고 유치 찬란한 게임으로 파트너를 정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희한한 게임이 있는 줄 몰랐다.

우리는 재미로 파트너를 정했지만, 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선샤인에서 나왔을 때 종로의 밤은 흔들리는 네온사인 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이있었다.

그땐 그랬다.

간판도 또와 노래방, 학사주점, 국일관이라는 나이트클럽도 있었다.

풋풋한 청춘들은 무작정 걸었다.

그 순간 ‘우와 첫눈!!’

‘눈 맛이 이렇게 달달했었나?’

아직은 어린 스무 살 초반의 여덟 명은 첫눈을 경배하듯 머리를 조금 숙이고 말없이 두리번거리며 명동까지 걸었다.

가슴은 콩닥콩닥 주머니 속의 손은 꼼지락꼼지락.

난 더 이상 장독대에 쌓여있는 눈을 먹다가 혼이난 여섯 살의 꼬맹이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그 해의 마지막 날, 다음 해의 첫날, 까치까치설날...

100일간의 즐거웠던 시간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지나 개강이 다가왔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을 따뜻하고 즐겁게 보낸 대가로

나는 오디션에서 당연히 미끄러졌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내 인생에 다시 못 올 순간들이었다.

아쉽게도 우리 네 명은 개강과 함께 연습실로 돌아가야 했고, 그들은 임관을 앞두고 훈련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렀고, 우리들의 추억은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몇 번의 뜨거운 여름과 스산한 가을낙엽이 지나갔다.

차디찬 겨울바람 뒤에 앳된 연초록의 담쟁이 잎들이 다시 찾아왔다.

솜털 뽀송했던 우리는 졸업연주를 마치고, 각자의 길을 찾아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봄볕에 잠깐 졸은 듯한데, 시간은 그새 30여 년이 흘렀다.

결혼을 했고, 지금은 신랑의 점점 비어 가는 정수리를 걱정하는 50대의 중년부인들이 되었다.

얼마 전 우연히 듣게 된 소식이지만,

그들 중 한 사람은 그날 본 첫눈이 인생의 마지막 첫눈이었다. 심장마비였다.

그리고 몇 해 뒤 다른 한 사람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또 다른 한 명은 돌아온 솔로가 되었고,

마지막 한 명은 아직도 울부짖는 하이에나로 짝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울다 지칠 때도 되었으련만.


이제 책을 보거나 글을 쓸 때도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다.

게다가 누구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도 굳이 화내기도 귀찮아졌다.

평온한 마음을 하루하루 유지해 나가는 게 바람이 된 지 오래다.

오늘도 내일도 이 자리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무지개 같은 2,30대도, 봄빛 같은 40대도 아닌 이제 60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란 걸 알게 되기까지 50년 넘게 걸렸다.


산책을 하고 있다.

길가의 벚나무는 봄꽃도 이쁘지만 가을의 낙엽도 꽤나 볼만하다.

초가을 벚나무길을 걷고 있다.

길 끝에 있는 아이스크림 카페에 가려한다.

피스타치오 젤라또..

keyword
이전 02화나의 강박은 무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