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나긴 오후에

by 여름나무

눈을 뜨기 싫다.

이대로 가루가 되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의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채하며 한동안 누워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눈치를 보며 억지로 아침밥을 몇 술 떴다.

오늘은 검사결과를 보러 아산병원에 가는 날이다.

“수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오만한 의사는 사춘기 소녀 이마에서 뾰루지 짜내는 정도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나의 오른손과 어깨인대는 너무 많은 혹사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수술대신 악기연주를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 방자한 의사에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연습하기도 물리는데 레슨만 하지 모!’

어깃장을 놨다.

오기가 발동된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티비를 보며 깔깔거리고, 뱃구레에 억지로 음식을 쑤셔 넣었다.

토했다. 복통에 밤새 아팠다.

나는 점점 야위어갔다.


동서울터미널.

무작정 강릉행 티켓을 끊었다.

그 해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이라고 터미널 티비 뉴스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댔다.

‘아! 추운 건 싫은데.. 날을 잘못 잡았다!’

‘이왕 왔으니 어쩔 수 없지..’

죽더라도 보기 좋게 바다에서 죽을 생각이었던 나는 키미테가 떨어질세라 정성 들여 귀 뒤에 붙였다. 초라하게 멀미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휴게소에서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 갓 구운 호두과자와 그렇게나 좋아했던 바나나우유를 샀다.

겨울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이 차창을 따뜻하게 데웠다.

졸음이 밀려왔다.

도착했다는 기사님의 둔탁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강릉이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강릉 바닷가는 굳이 바다에 뛰어들지 않아도 얼어 죽기에 충분했다.

엄청 추웠다.

그래도 왔으니 생각해 놓은 격식을 차려야 했다.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 내 마음을 정리하듯 나란히 놓았다.

양손에 따끈한 손난로를 꼬옥 쥐고 어금니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로 한발 두발 걸어갔다.

“으악~~!!”

"앗~~ 차거~~!! “

‘안 되겠다!’

오늘 같은 혹한의 날은 얼어붙은 내 마음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생을 마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날씨였다.

"봄에 다시 와야겠다."


그날부터 감기로 일주일을 꼬박 앓았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초라하게 마무리된 그날의 비겁했던 오후를 떠올리며 자책했다.

일주일 후 친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받지 말걸.

어쩔 수 없이 다음날 대타로 소개팅에 끌려나갔다.

‘아! 신촌을 한 번 더 와보길 잘했어!’

‘홍익 서점도 그대로구나!’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잘 봐둬야지!’

꽃샘추위에도 연둣빛의 귀여운 잎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틀 후 억지로 끌려나가 만난 소개팅 남자와 서울 성곽길을 산책했다.

우리는 서로 새로운 가족이 필요했다.

그는 안정된 가정을 원했고, 나는 애달파하는 엄마로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다이어리를 펴고 소풍 날짜를 잡 듯 결혼 날짜를 정했다.

그 해 12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함께 지낸 지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4월이면 벚꽃에 취해있었고, 9월이면 양념게장을 먹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인생은 예고편도 없고,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도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살아지는 거.

살아있으니 살아내야 하는 거.

대자연인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

인생이란 그런 거 같다.


날이 흐리다.

회색의 구름이 앞산의 정수리를 지웠다 그렸다를 반복한다.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창가 기다란 소파에 누워 나는 나의 할 일을 하고 있다.

구름을 보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