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었다.
3년 전 오늘.
설거지를 한다.
갑자기 “쨍그랑!” 손에서 미끄러졌다.
단단한 접시가 너무 쉽게 깨져버렸다.
이어지는 불길한 벨소리.
“아빠가 이상해! 빨리 와!”
새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다.
그날.. 내 평생 가장 거지 같은 날이었다.
토토는 나에게 줄넘기와 도미노를 가르쳤줬다.
내 키가 한 뼘 더 자랐을 때 달리기와 책 읽기를 함께했다.
쉬는 날에는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우리는 근처 산으로 놀러 가 풀밭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신비 그 자체였다.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데이트 코스를 빼놓지 않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짜장면.
토토는 입가에 잔뜩 묻은 짜장을 닦아주며 행복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시간은 흘러 나는 여중생이 되었다.
흰색 세일러복 블라우스에 진청색 스커트를 입고 머리는 포니테일스타일.
밤색 단화는 토토가 골랐다.
새침하고 예민한 말라깽이 딸내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나의 아빠.
나의 영원한 토토.
나는 토토가 70세가 되었을 때도 영원히 살 줄 알았다.
총기가 대단했고, 건강했고, 무엇보다 감수성이 아름다웠다.
사진, 책, 나무.. 그가 좋아한 모든 것은 그처럼 따뜻했다.
내가 여고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내가 악기를 연습하거나 공부를 할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괜히 악기를 시켰어! 아이 힘들잖아!”
“공부하지 마! 공부 안 해도 다 잘살아!”
엄마는 항상 “둘 다 정상은 아니야!” “쯧쯧쯧!”하시며 아빠를 끌다시피 내 방에서 나가주셨다.
1989년 2월.
드디어 나는 성년이 되었다.
우리는 명동 성당에 갔다.
나는 뻘쭘하게 맨 뒤에 앉았다.
토토는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황했다.
세상 최고라고 생각했던 아빠가 무릎을 꿇었다.
‘살면서 힘든 일이 많을 테지만 잘 헤쳐나가게 도와주소서.!’
아빠는 갓 성년이 된 철없는 딸아이를 맨 뒤에 앉혀놓고 기도를 드렸다.
함박눈이 내렸다.
낮에 먹은 단팥죽의 새알심처럼 희고 커다란 눈덩이는 내 작은 어깨를 두드렸다.
1996년 12월.
나의 결혼식.
어려서 나는 토토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 꺼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느 순간 치사해졌다.
나도 내꺼를 찾았다.
웨딩마치와 함께 토토는 나를 인수인계했다.
신혼여행지에 도착해 집에 전화를 했다.
“집이 떠내려가는 줄 알았다. 아빠가 얼마나 대성통곡을 몇 시간 동안 하는지 동네 부끄러워서 혼났어! 하하하”
엄마와 통화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토토는 게으르다.
절대로 아침에 산책 따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10분 거리에 신혼살림을 차리는 것이 결혼 허락 조건의 1순위였던 토토는 매일 새벽 산책을 했다.
눈이나 비가 내려도 항상 같은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거실 등이 켜지면 ‘잘 일어났구나!’ 하며 돌아섰다고 10년 후쯤 엄마를 통해 듣게 되었다.
토토의 사랑은 정말 징했다.
어느덧 나의 토토도 할아버지가 되었다.
점점 작아지고 이도 빠졌다.
나는 그를 위해 음식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고기는 잘게 다지고, 생선은 찜기에 부드럽게 쪘다.
오빠는 쉬는 날마다 토토를 씻기고 가끔은 병원 나들이를 했다.
그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2022년 9월.
그가 흙으로 돌아갔다.
한 평 남짓.
그의 자리다.
트로이메라이를 좋아했던 토토.
작은 연못가에 앉아 나에게 별을 가르쳐 주던 토토.
오늘은 그의 기일이다.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절편을 사러 가는 길이다.
조심스레 불어오는 초가을 바람에 아빠의 체취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