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오늘은 화장이 좀 진하다.
신랑 동창모임에 입고 갈 옷을 사러 백화점에 왔다.
매장에 들어갈 때 초라해 보이기 싫고, 피팅룸에서 나와 거울을 볼 때 화장발 없이 당당해질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얌전한 원피스와 스커트 두어 벌을 입어 봤다.
중력에 순응해 가는 내 모습을 인정 안 할 수 없었지만, 옷을 탓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주방용품코너를 어슬렁 거리다가 돌아왔다.
작년 연말에 신랑의 동창 모임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주일 전부터 고민스러운 건 나만이 아니겠지.
영양제도 그렇게 챙기지 않았는데, 아침저녁 하루 두 번 얼굴에 팩을 붙였다.
얼굴에 팩을 얹은 채로 드레스룸 귀퉁이에 박아둔 유행 지난 몇 개의 가방을 양쪽 어깨에 메고 거실로 나갔다. “어느 게 어울려?” 티비를 보던 신랑이 화들짝 놀란다.
밤마다 신랑 앞에서 패션쇼를 했다.
갑자기 멀쩡한 가방들이 짜증 났고, 지난번 백화점 갔을 때 깜빡 잊고 못 사온 립스틱이 더욱 간절했다.
몇 년 전 생일선물로 신랑이 사 준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H호텔 뷔페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의식하지 않은 척했지만, 여기저기서 눈 굴러가는 소리가 엄청나게 들렸다.
서로의 차림새로 경제 수준을 가늠해 보느라 속눈썹과 마스카라에 무거워진 눈들은 꽤나 바빴다.
얼마 전 미국주식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친구 부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진심 어린 우정을 한참 나누는 척하고 있을 때.
그때였다.
혜성같이 등장한 두 사람이 있었다.
혹시.. 설마...‘저 사람들인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부부 때문에 우리 모두는 폭소를 터뜨렸다.
멋지게 차려입고 왔으니 우리를 보라는 듯 오른쪽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살짝 움직이는 모습이 못생긴 타조 같았다.
남편타조는 긴 털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진한 갈색의 롱코트를 입었고,
부인타조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거대한 호피무늬 모피를 입었다.
그녀는 88년도 미스코리아 진 같은 머리에, 화장은 청담동 뷰티샾에서나 가능할 정도의 메이크업이었다. 그 옛날 80년대의 기억에 모두들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죄 없는 콧구멍들만 커졌다.
그녀의 가방은 이쁘긴 했다. 샤넬.
여자들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는 말이 실감되는 날이다.
화장실에서 만나는 부인들끼리 부러워하는 말을 조심스레 주고받은 눈치다.
삼삼오오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식사를 하며 건너편에 앉은 타조부인을 보게 되었다.
가방을 무릎에 앉혀놓고 불편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왜?? 머리에 이고 있지??' 안보는 듯했지만 은근히 고까운 속내를 꼼지락 거렸다.
타조부부는 멋쩍게 웃으며, 이쁜 옷에 흘릴새라 조심히 식사를 했다.
그날 수줍은 미소 덕분에 그들은 미움을 덜 샀다.
오늘 동창회 장소도 작년과 같은 H호텔이다.
남편은 “이참에 옷 한 벌 사지~!”
“아냐 맘에 드는 게 없었어.”
아침에 화장을 하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너무 과하지?"
신랑은 항상 그랬던 대로 빙긋이 웃어 주었다.
조금씩 톤을 다운시키고 아이라인도 다시 그렸다.
올림픽대로를 달리고 있다.
상쾌함이 몰려온다.
"이따가 오는 길에 지난번에 상수(타조)와이프 가져온 백 사러 가자~~!"
좌측에 있는 롯데백화점을 보자 신랑이 이야기했다.
"천 8백만 원쯤 할 걸~~ㅎㅎ"
"뚜뚜뚜" 3초쯤 적막이 흘렀을까.. 우린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저녁에 매콤한 제육볶음에 시원한 소주 어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