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너머

by 여름나무

눈이 왔다.

어젯밤에 몰래 내려앉은 흰 눈이 비스듬히 보이는 앞 동의 옥상을 덮었다.

오랜만에 만난 겨울 햇빛이 까탈스러운 눈을 달래듯 녹였다.


질퍽해진 보도블록을 조심스레 걸어 아파트 앞 마트로 향한다.

오늘 점심 메뉴는 제육볶음이다.

오전 11시 30분.

조카는 1시쯤 도착한다.

“지원아! 낼 점심 먹으러 올래?”

“좋아, 고모.”


지원이는 오빠의 고명딸이다.

처음 걸음마 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나였고, 처음 한글을 가르친 사람도 나였다.

나는 녀석이 희대의 천재인 줄 알았다.

네 살 무렵, 보채는 아이를 등에 업고 허름한 점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빨간 고딕체로 ‘담배’라고 쓰인 간판을 보더니, 녀석은 자신 있게 외쳤다.

“딤바!”

그 순간, 영재로 키워야겠다는 나의 원대한 계획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그날 오후, 잔뜩 흐리던 하늘이 갑자기 비를 퍼부었다.

지원이는 거실 창에 바짝 붙어 도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고모! 하나님이랑 천사들이 오줌 싸는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원이가 고모 말 잘 들으면, 하나님이 멋진 선물 주실 거야.”

지금 생각하면, 참 어설픈 어른이었다.

비가 그쳤다.

“지원아! 이리 와봐. 선물 도착했다. 저기 봐. 뭔지 알아?”

“우와! 예쁘다. 무지개다! 어린이집에서 배웠어!”

그리고 물었다.

“고모! 무지개 너머엔 뭐가 있어?”

“.........”

그날 저녁,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지원이는 돌아가며 무지개 너머에 뭐가 있냐고 물었다.

어른들은 서로를 보며 웃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 무지개 너머를 궁금해하던 꼬맹이는 스물다섯 살 숙녀가 되었다.

고모 손을 잡고 마트에 젤리를 사러 가던 짧은 다리의 오동통한 아기는 이제 없다.

키도 나보다 8센티나 더 크고, 힘도 더 세다.

야쿠르트병에 빨대를 꽂지 못해 고모를 찾던 그 아기는 이제 생맥주 500cc를 벌컥벌컥 마신다. 잼 뚜껑도, 캔 뚜껑도 한 번에 딴다.


상추와 깻잎을 씻었다.

지원이가 좋아하는 청양고추를 팍팍 넣은 제육볶음이 지글지글 소리를 낸다.

벨이 울린다.

“고모, 배고파!”

밥을 먹다 말고 문득 물었다.

“지원아! 무지개 너머에 뭐가 있을까?”

지원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글쎄?”

그리고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딸기를 달게 먹는 지원이를 보며 흐뭇하다.

‘무지개 너머에 뭐가 있는지 모르면 어때?’

‘지금처럼 건강하고 즐겁게 살면 최고지.’


지원아!

이제는 달달한 젖내도, 하얗고 오동통한 말랑거리는 볼도 없지만 건강히 잘 자라줘서 고맙고 든든하다.

앞으로 힘든 일도 많겠지만, 잘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무지개를 항상 간직하길 바란다.


날이 저물었다.

서늘해진 거실에 보일러를 켰다.

나는 무지개 대신 일곱 색깔이 들어 있는 색연필로 일기를 쓰고 있다.

따뜻한 카모마일향에 하루의 긴장이 풀린다.

아! 이제, 졸립다.

작가의 이전글봄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