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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Aug 11. 2022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오늘은 출근 전부터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등교할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딸애는 식탁에서 꼼지락거릴 뿐 물 한 모금 마신 것 외에는 아무 진전이 없다. 며칠 동안 장염 때문에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는 아이에게,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지.’ 한소리 했다가 우르릉 쾅쾅 천둥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이도 아파서인지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내가 잘못 말했나 보다. 아침에 나도 출근해야 하고 아이도 등교해야 하니 적정한 수준에서 서로 한 발 물러나기로 했다. 사는 게 쉬운 게 없다.


  출근시간에 늦을까 싶어 후다닥 주차장으로 내려가 급하게 차를 타고 출발했다. 다행히 도착 예정시간을 확인해 보니 늦지 않겠다. 오늘은 길이 막히지 않나 보다. 갑자기 긴장이 푹 꺼지면서 잠시 무기력해졌다. 차창을 내려 환기시키면서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노래를 듣는 것이다.


  너무 예민해지거나, 여러 감정에 중심을 읽고 휘둘리거나, 혹은 오늘처럼 의기소침해질 때 난 가수 김민기의 노래들을 들었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내 정신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함이다. 특별한 하루를 준비해야 하는 날에는 더더욱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기를 차분하게 끌어 모으고자 그를 찾았다.


  첫 곡(내가 듣는 그의 노래 모음 순이다)은 ‘상록수’.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대한민국 50주년 공익광고가 기억난다.

  박세리 선수가 US 여자오픈에서 우승할 당시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극적으로 스윙하는 장면과 함께 배경 음악으로 나왔던 양희은의 상록수는 IMF 한파로 움츠러들었던 우리 국민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좌절감에 주저앉아 있던 우리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물론 그런 격정적인 상록수도 감격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김민기의 상록수를 더 선호한다. 사실 이 노래는 1970년대 당시 노동운동을 하던 가수 김민기가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에 부를 축가로 만든 노래였으나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못 불렀다고 한다.


  이후 금지곡에서 해제되자 1993년 김민기가 자신의 대표곡을 재녹음한 앨범을 발표했을 때 ‘상록수’로 곡명을 붙여 나왔다. 어렵고 힘든 미래지만 같이 이겨내려는 연인들에게 조용히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힘을 북돋아주는 그의 목소리가 내 귀를 잡는다.




  두 번째 노래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그리고 그다음에 나오는 노래가 바로 ‘봉우리’이다.

 

  김민기의 다른 노래들도 가사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지만 봉우리는 더더욱 가슴 저리게 한다. 아니 인생에 관한 작은 일깨움을 주는 명상서 같다. 수도 없이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내게 따끔한 깨달음을 준다. 지난날 내가 지나왔던 허망의 시간들을 돌이켜 보게 한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그랬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높고 뾰족한 봉우리를 골라서 오르려 했다(지금 생각하면 너무 빈약하고 알맹이가 없는 공허의 그 무엇쯤이었다).



혼자였지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잊어버려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맞아, 그 봉우리에 오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거야.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 일행처럼 에메랄드 성의 마법사만 만나면 내 소망이 다 이루어질 거라고 더욱더 거세게 나를 다그쳤다.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내가 오르고자 했던 봉우리에 결국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 더 슬픈 건 그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내가 원했던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가끔씩 ‘내 삶의 대부분을 허투루 살아왔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가도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린다. ‘그런다고 지난 시간이 뭐가 달라지나?’ 다행히 나에겐 큰 병 없는 신체와 사랑하는 가족과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 아직도 나에겐 많은 기회와 감사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인생에 대해 철학적 지혜를 주었던 책, 영화, 노래들이 있었다. 특히나 책은 더욱 간절하게 말해주었다.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여러 작가들이 지나가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떠오르는 사람은 '레프 톨스토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세계적인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이다.


  그의 많은 작품에 비해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책은 단편집 두 권이다. 그러나 짧은 단편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울림은 장구하게 울려 퍼져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 물음>.


어느 날, 한 황제가 깊이 이런 생각을 했다.
‘만일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다면......, 내게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과 무슨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지 항상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품 속 황제가 알고 싶은 세 가지 질문은 현실 속 우리 역시 언제나 자신에게 던지는 있는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는 뛰어나다고 칭송받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지혜롭다고 널리 알려진 은사(隱士)를 찾아가 물어보기로 했다.


황제가 묻자 은사가 답했다.

“.....  기억하시오.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왜 지금이 가장 중요하겠소? 우리는 오직 ‘지금’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말이지요

또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오. 앞으로 그 어떤 상황에서 그 누구와 자신이 인간관계를 맺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함께 있는 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오. 오직 이를 위해 인간이 이 세상에 왔소.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오.”



  우리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소중히 간직해야 할, 그리고 실천해야 할 해답이 이 소설에 담겨있다. 많은 책과 이야기들을 통해 익히 들어온 내용들이고 어쩌면 진부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오늘도 다가온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좀 더 내가 원하는 ‘미래’로 가까이 갈 수 있기에 오늘도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다만, 내가 잊어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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