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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Sep 27. 2022

그래, 아빠는 너를 믿는다.

고양이 골목 냥집사의 아빠!

#표지 그림: 우리집 화가. <우 to the 영 to the 우>. 2022.




  요즘은 집에서 틈틈이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예전에는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치부했다. 회사 일이 바쁘고 어린 딸애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시간에도 종류가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물리적인” 시간이 있지만 또 다른 차원의 “심리적인” 시간도 있다(하긴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물리적인 시간도 본인이 처한 상태와 속도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리적인 시간이 뇌의 이성에 근거한다면 심리적인 시간은 마음의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계를 보면서 약속시간까지 남은 물리적인 시간을 확인할 수는 있어도 그 시간 동안 책을 읽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내가 가지는 심리적인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결론적으로 내가 요즘 책을 볼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은 아이의 성장과 회사에서의 업무 변화 같은 물리적인 요인도 있지만, 책을 읽고 싶다는 욕구와 내 삶에 기여하고 싶다는 열의가 예전에는 없었던 심리적 시간을 만들어 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을 흘겨보는 사람이 한 명 있으니 역시나 내 딸이다. 자기랑 놀아줘도 될까 말까인데, 본인이 무슨 대단한 작가나 된 것처럼 모니터 앞에서 시름에 젖어있는 나(아빠)를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을까?  

 

  여러 번의 방해공작과 신경전에도 내가 꿈쩍 않고 내 갈 길에 전념하자 무척 놀랐나 보다. 딸애는 최근 작전을 바꾸었다. 갑자기 내가 쓴 글들을 보여 달라고 졸라댔다. 아마 내 평정심을 무너뜨리는 심리전을 시도해서 내가 자폭하게 만드는 고도의 전술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민 끝에 딸애의 수준을 고려하면서도 적의 기만에 넘어가지 않을 적당한 글을 찾다가 반려동물에 관해 쓴 「저는 당신에게 괜찮은 사람인가요?」를 브런치(brunch)에서 보여 주었다.


  다행히 의외로 괜찮았나 보다. 그 일 이후로 틈만 나면 브런치에 들어가 글을 읽는데 요즘은 아예 ‘고양이’를 검색하여 관련 작품을 읽는다.


  우리 아이는 정말 고양이를 좋아한다. 책을 읽어도 등장인물에 고양이가 나와야 한다. 즐겨 보는 유튜브 영상도 거의 고양이들과 집사들의 알콩달콩 로맨스이다. 문구류는 말할 것도 없고 옷도 고양이 그림이 있는 것을 즐겨 입는다. 재밌는 얘기라고 꺼내는 것도 친구 집 고양이 아니면 골목길에서 만난 길냥이 관련 에피소드들이다.


  비록 고양이로 소재가 한 되지만 딸애가 브런치에서 재미있는 글을 찾아 읽고 글쓰기에도 관심을 가지는 모습에 일견 대견해 보이다가도 핸드폰을 너무 많이 봐서 눈이 나빠질까 봐 조금씩만 보도록 제한시간을 걸어 두었다. 그랬더니 ‘갑툭튀’ 새롭게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나에게 고양이 관련 책을 쓰라는 의뢰였다.


  너무 어이가 없기는 한데 나를 ‘책 출간하는 작가’ 반열로 올려 준 아이의 고매한(?) 안목에 답을 해주는 게 마땅한 도리 아니겠는가. 결국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을 묶어 아빠 책을 출간하고 그 후에 고양이 책을 써 주겠다고 약속했다. 허 참, 꿈도 야무지다.




    오늘도 거실 모니터에서 며칠 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주제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삐딱한 표정의 딸애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이의 얼굴은 ‘고양이’상이다. 가느다란 눈매와 긴 눈꼬리가 만들어내는 도도한 분위기에 앙칼질 것 같은 인상이 고양이를 닮았다. 고양이 얼굴 중에서도 둥근형이라 더욱 귀엽고 깜찍하다.

*고양이 얼굴형은 크게 둥근형, 사각형, 세모형으로 나눠지는데 우리 딸애는 둥근형에 가깝다.


  행동하는 것도 그렇다. 평소에도 무언가에 가려지는 곳을 좋아하는데. 낯선 이가 나타나면 더욱 우묵하고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 버린다. 겁도 많고 새로운 사람에게 낯을 많이 가리지만, 엄마, 아빠가 오면 집사로 생각하는지 무릎에 오르고 안아달라고 하면서 애정표현을 많이 한다.


  다만 감정 변화가 심해 그 의도를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본인의 의지대로 상대를 조종하는 초(超)심술이 틀림없다.   


  “아빠, 뭐 해?”


  “뭐하긴, 글 쓰는 거 안 보여?”


  “내가 말한 고양이 책은 언제 쓰는데? 브런치(brunch)에도 고양이 글 엄청 많아. 아빠가 쓰는 그런 재미없는 글 말고 고양이 글을 쓰라니까.”


  “아빠는 고양이에 대해 잘 몰라. 자기가 잘 아는 내용도 쓰기 쉽지 않은데 잘 모르면 느낌이 없잖아.”


  “고양이는 내가 잘 아니까 나랑 같이 ‘고양이 골목’으로 나가자. 거기서 내가 하는 걸 보면 될 거야.”


  생떼도 이런 생떼가 없다. 그러나 집에 있어도 나를 편하게 놔 둘 리가 없겠다 싶어 주말에 같이 가기로 했다. 그날 고양이와 생긴 일을 소재로 글도 쓰기로 약속했다. 우선의 곤란함을 피하기 위해 뒷감당도 안 되는 말을 해버렸다. 어쩌겠나, 그날 걱정은 그날 하라고 했으니 뭔가 수가 있겠지.




  주말이 되었다. 저 세상 끝까지 보일 듯 화창한 가을 하늘에 선선한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 주니 절로 기분 좋은 늦은 오후였다. 연습장에서 한참 몸을 풀고 있는데 띠리리 전화가 왔다. 딸애였다.


  “아빠, 어디야?”


  “아까 운동 간다고 했잖아.”


  “그럼, 몇 시에 오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나랑 고양이 골목에 가서 놀기로 했잖아!”


  목소리를 들어보니 심상치가 않아 원래 생각했던 만큼 연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집에 왔다. 다행히 상황이 최악은 아닌 모양인지 순순히 따라나설 기세다. 알고 보니 그냥 순순히는 아니었다. 전문가들은 장비 빨(?)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이의 준비하는 모습에 장인의 기품이 느껴졌다.


  우선 길냥이 만나러 갈 때 쓰는 전용 가방을 꺼낸다(내 보기엔 그게 그건데). 그 속에 냥이 사료와 츄르(간식), 물통을 준비한다. 물론 지난번 쓴 물은 버리고 정수기에서 내린 새 물을 정성껏 담았다. 날씨가 선선해졌다고 충전식 선풍기는 빼고 핫팩을 대신 집어넣었다(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해서).


  그리고 뭔가 더 찾고 있는 걸 성질 급한 내가 그만 가자고 졸랐다. 아이는 성마르게 보채는 나를 보면서 혀를 찼다.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아이가 입에 달고 사는 ‘고양이 골목’은 우리가 자주 산책하는 그 길이었다. 평소에는 유심히 안 봐서 미처 몰랐는데 길 양쪽에 냥이 텐트들이 많이 있었다. 길냥이를 아끼고 살피는 딸애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나 보다. 골목 초입부터 찬찬히 좌우를 살피는데 냥이들이 보이지 않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너무 늦어서 고양이들이 안 나오면 어떡하지? 얘네들도 주말 저녁에는 쉬어야지.”


  “고양이는 원래 야행성이야. 근데 진짜 잘 안 보이네. 내가 이쪽을 볼 테니 아빠는 저쪽을 봐. 구석구석 잘 봐야 해.”


  다행스럽게도 내 쪽 편에서 새끼 고양이들의 모습을 찾아냈다. 총 세 마리였다.


  나는 냥이들이 다시 가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는데 딸애는 천연덕스럽게 냥이 만찬 준비를 한다. 우선 냥이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먹이를 조금씩 주면서 우리 쪽으로 오도록 유도해 놓고 자리에 앉아 츄르와 물통을 펼쳐 놓는다. 원래는 냥이 캔도 있었는데 오늘은 바닥이 났다고 한다.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가지도 오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데 대담한 놈 하나가 성큼 기어 와서 먹이를 받아먹으면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딸애는 미동도 없이 슬그머니 한 손을 뻗어 냥이 입에 먹이를 준다. 다른 손으로는 자연스럽게 냥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게 마음에 드는지 냥이가 몸을 쭉 늘어트리면서 몸을 흔든다.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나머지 두 마리도 다가와 먹이를 먹지만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이 불안해 보였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했던가. 결국 첫 번째 냥이만 배부르게 먹었다.




  딸애는 이 새로운 삼 남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순서대로 ‘또리’, ‘뽀리’, ‘요미’였다. 이렇게 번개로 만난 냥이들까지 이름을 남발하는 아이를 보면서 매사에 성의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얘네들 이름 지어줬는데 구별할 수 있어? 난 전혀 모르겠던데.”


  “난 다 기억해. 털 색깔이 달라. 글구 나랑 △△랑 돌보는 고양이를 다 합치면 이십 마리도 넘어. 물론 내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서 냥이 리스트를 읊기 시작했다. 인연을 맺은 순서대로 ‘순이’, ‘초코’, ‘크림’, ‘쿠키’, ‘무늬’, ‘지니’, ‘레오’, ‘치즈’, ‘엘리스’, ‘리사(방울이)’, ‘엘라’, ‘엔젤이’가 있다고 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만난 냥이들은 아파트 이름을 따서 ‘몽’ 자를 넣었다고 한다. ‘몽린이’, ‘몽지’, ‘몽몽이’, ‘몽실이’, ‘깜몽이’까지. 특히, 아파트 냥이들은 겁이 많아 자동차 밑에 주로 있고 먹이를 줘도 도망가기 일쑤라고 한다.


  여기에 오늘 만난 고양이 삼 남매 ‘또리’, ‘뽀리’, ‘요미’와 집에 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만난 ‘달지’까지. 이 많은 냥이들 이름을 줄줄 외는데, 마법사 주문도 아니고. 듣기만 하는데도 숨 가쁘다.  


  평소 학습지 수학 문제를 풀 때마다 구구단이 기억 안 난다고, 구구단을 꼭 외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투덜대는 아이가 그 많은 고양이를 구별하고 이름까지 불러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건 심리적 자기 착각에 가깝다.




  그러함에도 딸애의 냥이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예쁘다. 나 아닌 존재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눠준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님을 경험상 체득한 지 오래다. 


  평소 딸애는 뭔가에 집중하다가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연연하지 않고 쿨하게 포기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먼저 다가서기보다는 누군가가 이끌어주길 바라며 낯을 많이 가려 왠지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나는 못하면서도 딸애는 더 상냥한 웃는 얼굴로 바뀌길 원했다.


  그런 모습이 전부인양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길냥이를 대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빠임에도 제 딸의 속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책이 들었다.


  상대방에게 제 뜻을 강요하지 않고 그 의견을 존중하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 강자 앞이라 이유 없이 물러서지 않고 약자를 측은히 보살펴 줄 수 있는 의리와 속정이 많은 태도. 무엇보다 그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은일자적할 수 있는 여유와 배짱이 있는 태도.


  딸애를 보면서 내가 본받은 존경스러운 모습들이다.


  "아빠, 다음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오자. 오늘은 좀 부족했어."


  "이 정도면 다 한 거 아냐?"


  "아빠는 그냥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더 많이 가르쳐 줄게."


  그래, 아빠는 너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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