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그림: 살바도르 달리. <새로운 사람의 탄생을 지켜보는 지정학자의 아이>.1943.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 유대교에서 선의 신을 의미하는 '야훼'와 악마의 신인 '사탄'을 합친 개념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DEMIAN)>에서 인용
<데미안>은독일 문학의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던 작품으로, 열 살 소년이 스무 살 청년이 되기까지 고독하고 힘든 성장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많은 이들이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향하는,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의 기록'이라고 평한다.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한 추구의 과정이 성찰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고도한다.
헤세는 작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라고언급했는데 누구나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임을상기시켜 주려는 그의 마음이 와닿았다.
요즘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주저된다. 주위 사람들이 웃고 있어도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는다. 맘껏 웃어본 적이 언제인가 싶다. 세 살배기 꼬마의 혀 짧은 소리나 부정확한 발음으로 곤욕을 치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음식을 먹고 나면 입 속에 모래를 잔뜩 물고 있는 것 같은 이물감(異物感)이 내 감각을 지배한다. 내 입 안에 있는 치아와 잇몸사이로 정체불명의 뭔가가 꾸물꾸물 기어 다니다 숨어버리기에 그 낭패감을 피할 수 없다.
15년째 다니는 치과 선생님의 충격적인 소견을 듣고 시작한 치아교정이 어느덧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이번 달 검진을 받기 위해 퇴근 후 치과 대기실에서 순번을 기다리다가 문득 그날이 떠올라 다시금 몸을 떨었다.
“고객님은 연령에 비해 잇몸의 녹아내리는 정도가 심합니다. 치열이 고르지 못하여 칫솔질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상하악이고르게 교합되지않아 잇몸에 미치는 충격이 커서 개선이 어렵습니다. 이 상태로는 나중에 임플란트도 쉽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치아교정을 하여 향후 임플란트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치아교정을 하여 향후 임플란트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스케일링과 잇몸치료를 받아 왔지만 내 잇몸은 점점 더 그 앙상한 뿌리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급기야 선생님은 나에게 최후통첩과 같은 두려움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던지셨다.
치아교정이라니! 나에게 그건 미용을 위해 부자들이나 연예인들이 하는 성형시술이었다. 내가 살아왔던 세계에서 그건 부(富)의 과시였다. ‘봐라, 나는 이빨에 쇠꼬챙이를 붙이는 일에도 수백만 원씩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한때는 나도 치아교정을 하고 싶었다. 왜 모르겠나, 내 치아가 그리 예쁘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내겐 그런 사치를 누릴 기회가 없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치아교정을 그저 하찮은 가치로 전락시키는 자기 합리화뿐이었다.
한때는 나도 치아교정을 하고 싶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세상이 도래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애의 치아교정은 영구치가 채 나오기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소문난 교정 전문병원을 몇 군데나 다녔다. 그런 많은 발품의 결과로 알게 된 건 고작 ‘영구치가 다 나와야 치아교정을 할 수 있다’는 의사의 어이없음이었다.
첫 시작은 두렵고,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관성에 따라 모른 체했던 것을 '바로잡기'란 곱절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다 알려졌는데 이제 와서...’ 혹은 ‘지금까지 버텨온 본전 생각이 나서...’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처음 교정 상담을 받고 치료를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고려가 필요했다. 어쩌면 그동안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거슬리기 시작했고 상담을 받으며 나의 상황을 그대로 마주해야 했다.
최소 18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보철물을 끼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나보다 앞서 그'고난의 행군'을 경험한 지인들의 조언은 그 길에 동참하지 말라는경고로 들렸다.
한 달 이상 지리멸렬한 논리적 공방이 내 머릿속에서 펼쳐졌는데 양측 주장이 각각의 타당성과 오류를 갖기에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팽팽한 상황에서는 대부분 ‘명분’을 장악하는 측이 이기게 마련이다.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이 사안의 명분을 찾아보았다. 이 문제가 왜 갑자기 툭 튀어나왔을까? 내가 이 나이에도 주위의 시선과 일상생활에서 견뎌야 할 불편과 고통을 딛고 교정을 해야 할 절실함이 있을까?
그건 내가 치과 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음에도 잇몸이 녹아내리면서 언젠가 틀니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위험 때문이었다. 결코 나의 돌출된 구강구조나 고르지 않은 치열 같은 '미용'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명분을 차지한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곧장 실행에 옮겼다. 여러 가지 떠오르는 난관과 걱정들은 더 큰 목적을 위해 인내해야 할 부분적 희생일 뿐이었다.
하루하루의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한 달 그리고 수개월의 차이는 확인할 수 있다. 오합지졸의 흐트러진 치아들이 점차 오와 열을 맞춘 사기충천한 전사로 변모해 간다.
이 가시성이 ‘조금 더 일찍할 걸.’ 혹은 ‘지금이라도 해서 다행이야.’라는 일종의 안도감에 더해 자신감을 준다.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난 지금까지 타성에 젖어 회의(懷疑)에 묻어 두었던 문제들이라도 다시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면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세상의 중요한 업적 대부분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바로잡고자 도전한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내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 우러나오는 동기부여는 내 생각을 바꾸고 내 행동을 변화시켜 내 삶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 것이다.
내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 우러나오는 동기부여는 내 생각을 바꾸고 내 행동을 변화시켜 내 삶을 바로잡을 것이다.
이에 더해 내가 이번 치아교정을 반드시 성공의 공식으로 이끌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딸애가 벌써부터 치아교정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반대 의사를 공공연히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딸애는 오랜 기간에 걸쳐 불편과 아픔과 짜증을 감내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난 집에서 치아교정으로 인한 어떠한 부정적 흔적도 보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 중이다. 가끔 딸애가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라치면 거짓이라도 보여줄 각오로 밝은 면만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내 의욕이 오히려 나중에 더 큰 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내가 아는 딸애는 비록 처음에 예상 밖의 뒷걸음을 치더라도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생각을 바로잡아 더 나은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내가 쉰 즈음에 깨달은 것을 딸애는 더 빨리 배워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자녀가 한 세계를 깨고 나오도록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