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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Jul 31. 2024

배가 불러서 그래.

아이가 커가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표지 그림: 앙리 쥘 장 조프로이,  <작은 주부들>.





할머니가 수박을 잘라주셨다.

할머니가 잘라주신 수박 안에는
씨가 하나도 없다.
쏙쏙쏙!
할머니가 모두 빼주시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가시고
엄마도 수박을 잘라주셨다.
콕콕콕!
씨가 많이도 박혀있다.

엄마가 잘라주신
수박을 먹으면서
할머니 수박이 그리워졌다.

문득
우리 할머니 보고 싶어졌다.


- 『할머니의 수박』  서울용동초등학교 이하진. 제30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2022) <어린이 동시문학> 부문 수상작 -







  올여름은 폭우와 폭염이 나선고리의 이중 가닥처럼 겹쳐 오는 최악의 날씨를 만들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한반도는 최근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생겨난 '한국형 스콜(Squall)'이라는 새로운 날씨에 직면하고 있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여름은 보통 6월 말부터 7월 중하순까지 지루하게 내리는 장마철을 겪다가, 7월 말부터 햇볕 쨍쨍한 폭염이 온 나라를 데우는 혹서기로 접어들면서 낮에는 물론이고 밤잠을 설치는 '열대야'라는 악몽에 빠진다.


  그러다가 정말 신기하게도 '광복절'을 기점으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렇게 9월 말까지 버티다 보면 드디어 10월, 전 세계 어느 곳보다 화창하고 청명한 가을을 맞이한다. 아, 천고마비!


  그런데 8월에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단시간에 엄청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와서 한바탕 물난리를 일으킨다. 그리곤 금세 폭염이 덮치면 한증막 같은 뜨겁고 습한 날씨에 도저히 야외활동을 할 수가 없다. 점점 아열대 기후로 변하고 있다.


하늘에서 일부 지역에만 내리는 물 폭탄






  이렇게 찜통같이 후덥지근한 날씨엔 별도리가 없다. 그냥 납작 엎드려 이 시기가 별 탈 없이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그런데 요즘 같아서는 그런 방식으로도 도저히 해결이 안 된다. 방법은 오직 하나! 에어컨 아래서 실외와의 접촉을 끊고 사는 것이다. 물론 각자에게 허용되는 선에서 말이다.


  그런데 나에겐 나만의 특별한 여름 나기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만든 달콤한 수박을 먹으며 속을 뻥 뚫어버리는 것이다. 시원하게 할수록 더 맛있는 과일인 수박이야말로 여름 더위를 날려 보내기 위해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름에 누구나 수박을 반기겠지만 나는 정말 진짜로 좋아한다. 작정하면 한 번에 수박 반 통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다. 집에 오자마자 땀이 밴 꿉꿉한 옷을 갈아입고 냉장고에서 미리 준비해 둔 수박을 꺼내 먹노라면 온몸의 혈관이 청량한 약수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집 식구들은 수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덕분에 무지하게 좋아하는 수박을 나만 실컷 먹어도 아무런 불평이 없다. 그래서 수박을 사 오는 것도, 먹기 좋게 깍둑썰기로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도, 수박 껍질을 모아 정리하고 음식물쓰레기로 버리는  내가 전담한다.      

  

깍둑썰기한 수박 디테일






  딸애는 입이 짧다. 아기 때 뱃고랑을 못 키워서 그런지 먹는 양이 적고 음식을 많이 가려 이것저것 잘 안 먹는 음식도 많다. 한번은 우리 세 식구가 ‘피자’를 주문해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 딸애만 배탈이 나서 삼일 동안 너무 고생하고는 그 후론 그와 비슷한 음식에는 아예 손도 지 않는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가 잘 먹지 않아서 키도 작고 체력이 부족해 보이면 그보다 더 속상한 것이 없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딸애의 친구들과 비교하게 된다.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아무리 겉으로 표시 내지 않으려 해도 딸애는 내 마음을 금방 알아차린다. 식사 때마다 입씨름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과일도 별반 차이가 없다. 복숭아, 포도, 귤, 블루베리 정도만 좀 입에 대는데 그것도 얼마 안 먹는다. 아내는 과일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도 딸애가 먹겠다고 하면 어찌나 기쁜지 금액을 보지도 않고 사는데 막상 얼마 먹지도 않고 시들해진다.


  “이렇게 얼마 안 먹고 남겨 놓으면 어떡해? 이것만이라도 마저 먹어!”


  “금방 먹었잖아, 더 얼마나 먹으라고. 그리고 별로 맛도 없어.”


  “아빠는 이런 것 먹고 싶어도 실컷 못 먹었는데. <니가 배가 불러서 그래>. 배가 고파 봐야 알지.”   


  “아빠, 나는 아빠하고 달라. 사람마다 먹는 게 다른 거야. 그리고 그런 얘기 자꾸 하면 아빠가 <꼰대>라는 것만 떠벌리는 거야.”


오늘의 단어 '꼰대'(kkondae),amazon.com


  ‘우라질! 지 새끼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하는 부모에게 꼰대라니!’ 세상에 망조가 들어도 열 번은 더 들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 꼰대라는 말만 들으면 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뭐 하러 사나 싶다. 이런 나를 아는지 딸애는 뭐든 어려운 상황이 오면 이 꼰대 작전으로 위기를 헤쳐 나간다.






  비록 내가 어렸을 적에는 없어서 못 먹은 음식이 너무 많았지만, 그래도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도 먹기 싫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땐 ‘버섯’이나 ‘가지’로 만드는 흐물흐물한 반찬이 싫었다. '보리밥'이나 '조밥'싫었다. 가끔씩 친지들이 모여 집에서 이상한 냄새 풀풀 풍기며 찌는 '소 내장'도 먹기 싫었다.


  그러면 우리 집 어른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니가 배가 불러서 그래!”


  그때마다 난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주면 정말 배 터지도록 먹을 수 있는데, 그런 건 해주지도 못하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야단을 맞았다. 그땐 그랬다.    


  그랬던 내가 나이가 들자 그때 그 음식들이 맛있어지기 시작했다. 가지무침맛있고 버섯요리도 잘 먹는다. 보리밥은 건강식이라고 전문 식당에서만 나온다. 소 ‘간’이나 천엽은 기본이고, 곱창이니 막창이니 대창 같은 것은 값이 비싸 실컷 먹기도 쉽지 않다.


지금은 너무도 맛있는 '가지 무침'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음식을 먹어도 어렸을 때 먹던 그 맛이 떠올라 왠지 2프로 부족함을 감출 수 없다. 그 맛을 다시 맛볼 수 없기에,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가끔씩 떠오르는 추억들을 두 손 뻗어 잡아보려 지만 이제는 아련한 헛손질뿐이다.     






  올해 들어 딸애가 많이 변했다. 키가 크려는지 전에 먹지 않던 육개장이나 부대찌개도 먹고 아내가 해주는 김치볶음밥도 맛있다고 우걱우걱 먹는다. 지난 주말에는 나보다 더 큰 햄버거에, 감자튀김도 다 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올해 키가 많이 컸다. 요즘 딸애 하는 짓이 너무 예쁘다.


  무엇보다 더 기쁜 은 내가 좋아하는 수박도 맛있다고 잘 먹는다는 것이다. 내가 수박을 손질하려고 하면 자기도 한 번 해보겠다고 따라와 옆에 서있다. 위험하다고 말하면서도 딸애가 서툰 솜씨로 수박 절반을 싹둑 자르는 걸 보고 있노라 어찌나 흐뭇한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꺼내면서 같이 먹자고 딸애를 부른다. 그러면 천사 같은 소리로 대답하면서 식탁으로 나오는 딸애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든다.


  아이가 커가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 이 순환고리가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지!  


  만약 언젠가 딸애가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었을 때 그 아이가 또 잘 안 먹는 모습을 보인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그때는 지금처럼 '니가 배가 불러서 그래!'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어린아이의 감성적 솔직함을 어른의 개인적 경험을 기준으로 재단해 결론 내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종의 겁박에 가깝다. 더구나 아이는 어른이 되면서 스스로 잘잘못을 깨닫고 치유해 나갈 것이기에 내가 그 가능성을 미리 깨뜨려서는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


 # 추신 : 물론 딸애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말이다.(*내 예상으론 나보다 훨씬 더 독하고 살벌하게 야단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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