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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Oct 12. 2022

고통에 대한 짤막한 소고(小考)

선택인가, 필요악인가?



  기온이 제법 쌀쌀해졌다. 한낮에도 반팔 옷은 종적을 감춘 지 제법 오래되었다. 지난 주말에 내린 비는 수목들의 단풍을 재촉할 테지만 사람들은 벌써 겨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장롱 속에 넣어 두었던 겨울옷을 꺼내야지.’


  유난히 덥기도 했지만 그 더위로 축축 늘어진 엿가락 같은 내 정신을 도저히 어쩌지 못했던 그 가혹한 여름이 드디어 떠났다. ‘해야 한다는 마음’과 ‘하고 있는 행동’ 사이의 불일치가 수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만들었다. 이젠 그것들과도 이별이다. 아쉽지도 시원섭섭하지도 않다. 아니 통쾌하고 온 몸에 기력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회사 일도 본 궤도에 올라 레일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지난여름부터 준비한 프로젝트들의 결과를 곧 보게 될 것이다. 우물쭈물하거나 우유부단하게 뒤로 미룰 여유도 없이 이제는 계획대로 추진해야 하는 이 시간이 차라리 좋다.


  만족스럽든 좀 아쉽든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무르익은 지금의 내가 대견하다. 이 순간이 올 때까지 얼마나 많이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불필요한 걱정과 오해와 그로 인한 불화(고통)를 겪었던가?




  오늘 점심때 먹은 청양고추의 매운맛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매운맛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 매운 고추의 유혹엔 늘 쉽게 넘어간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매운맛은 사실 맛이 아니다!


  우리가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은 쓴맛, 단맛, 신맛, 짠맛. 이 네 가지뿐이다.


  매운맛이라고 통칭되는 것은 혀의 감각세포가 맛을 느끼는 게 아니라 온도에 반응해 통증을 감지하는 것이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매운맛이 통증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배우면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난다.


  매운맛이 나의 욕구이자 기호일 거라 생각했는데 통증이라고 한다. 그럼 우리는 어떤 면에서 스스로 고통을 원했던 걸까?     




  고통은 아픔을 뜻하며, 통증(痛症)이라고도 한다. 흔히 신체의 일부에 피해가 생겨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불쾌감과 우울함 등의 부정적 감정으로 ‘괴롭다’고 여기는 정신적 고통으로 나뉜다.  


  철학적으로 접근하자면 고통은 인간의 기술 발전과 창조의 원동력이다. 아무도 살아가면서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예술을 창조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인류의 발전사는 고통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디폴트(default) 값처럼 정해진 욕심을 어디에 배치해서 어떻게 운영해야 우리의 인생을 더욱 생기 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그 핵심이다.




  황금률(Golden Rule)이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즐겨 인용하고 삶의 기준으로 자주 인식하는 어구이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대개는 기독교만의 교리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인류의 수많은 종교와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원칙이다.


  이처럼 진리는 형이상학적이고 복잡한 설명과 난해한 해석, 그리고 설득과 논증이 필요한 어떤 것, 혹은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들의 지식이나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류의 정신 속에 이어져 온 경험을 통한 보편적 지혜(보편 정신 또는 보편적 가치) 속에 존재한다.


  결국 황금률은 “바른 헤아림”에 있다. 자기를 살펴 미루어 헤아리고 자기를 헤아리는 그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이 헤아림의 과정이 바로 소통이요 공감의 시작이다.


   '조셉 머피'가 쓴 [황금률]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황금률이란 대우주의 법칙이며 그 핵심은 '인생은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구별없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태양이 모든 이의 머리 위를 비추듯 황금률은 공평하게 작용한다.


  그렇기에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인생이 찾아올 리 없으며, 끊임없이 떠오르는 나쁜 상념들이 잠재의식을 작용시켜 불안과 걱정같은 고통에 시달리게 만든다고 말한다.




  영화 <콘스탄틴>이 거의 20여년 만에 속편이 제작될 예정이라고 떠들썩하다. 이 영화를 "인생영화"로 당당히 꼽을 수 있는 나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다.



  이 영화의 모티브는 인간이 아닌 혼혈 천사와 혼혈 악마의 대립이다. 인간들을 조종하는 혼혈종이 사는 세상, 어릴 때부터 그들을 볼 수 있던 주인공 '콘스탄틴'은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며 자살을 시도한다.  


  죽어있던 2분간 경험한 지옥의 세계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돼버리고, 존 콘스탄틴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퇴마 일을 열심히 한다.(천주교에서 '자살'은 큰 죄악이다.)

지옥에 간 콘스탄틴

  대천사 '가브리엘'과 악마왕 '루시퍼'가 등장하는 후반부터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세상을 악으로 지배하려는 '마몬'(루시퍼의 아들)을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천사 가브리엘이었다. 영화 속에서 가브리엘이 말했던 대사가 나를 애끓게 만든다.


너희(인간)는 크나큰 은총을 받았어.
주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은총...
살인마든, 강간범이든
회개만 하면 주의 품에 안길 수 있지.

난 너희를 지켜봐 왔어.
너흰 공포 앞에서 선한 본성이 나와.
훨씬 더 경건해지지.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견딘 자만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어.
루시퍼를 만난 가브리엘

  인간의 선한 본성을 일깨우기 위해 오히려 악마를 불러내 공포로 온 세상을 물들이겠다는 가브리엘의 결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싶다가도 곧 그 말을 모두 정할 수만은 없는 나를 만나게 된다. 가브리엘과 마몬이 협작한 이 음모가 나를 포함한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고통의 본질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신이 지금의 세상을, 생명체를, 특히 인간을 허락한 이유가 무너지게 된다.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신은 콘스탄틴으로 하여금 루시퍼를 소환하게 하여 이 엄청난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다시 이끈다. 그렇게 또 살만한 세상이 되었다.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인과율적으로 아귀가 맞는 그럴듯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는 수백, 수천 가지의 작은 사랑과 작은 선행과 작은 용서와 작은 감사이다. 그 작은 것들로 이루어지는 기쁨은 그러나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고통을 논리로 설명할 수 없듯이 기쁨 역시 인과율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많은 경우 기쁨은 고통과 함께, 고통 속에서, 혹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찾아온다. "눈물 속에서도 삶은 좋은 것이다."  이 사실이 고통을 그저 버리거나 벗어나야 할 존재가 아니게 하는 이유이다.

    

  영화 끝에 나오는 콘스탄틴의 독백이 참 멋있다. 고통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좋은 마음가짐이다. 이 영화의 찐 팬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후속작이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길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란다.


모든 건 신의 계획 하에 있다.
난 두 번이나 죽고서야 그걸 깨닫게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듯,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받아들일 수밖에.
콘스탄틴 엔딩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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