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살기 좋은 곳이다. 물론 지극히 내 기준이지만 말이다. 도보 10분 거리에 넓은 호수공원이 있고 수변로(水邊路)가 격자모양으로 자전거도로와 연결되어 있어 산책과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유명 물놀이 시설이 지척에 있고 시립도서관도 2곳이나 있어 주말에도 굳이 멀리 나갈 필요가 없다. 지하철 1호선과 7호선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더블 역세권에, 아이 학교도 가깝고 아내 직장 셔틀버스도 집 앞을 지나가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그런데 며칠 있으면 이사를 간다. 다만 지금 누리는 이 혜택을 포기할 수 없어 바로 길 건너 아파트로 옮겨 간다. 너무 가까워서 이사 가는 게 맞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굳이 이렇게 이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단이 아내의 불만족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누군가는 억울하다고 생각하려나? 이상하게 아내의 친구나 직장 동료들은 크고 넓고 깨끗한 집에 살았다.
머니투데이. "김성령,으리으리한 한강 뷰 집 공개". 기사 사진 캡처
아내가 그들 집에 놀러 가거나 만나서 수다를 떨고 온 날은 그 부족함에 대한 하소연을 길게 했다.
물론 나도 지금 집이 좀 작다는 걸 안다. 몇 년 전에 조그만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부족한 자금을 구하기 위해 집을 줄여서 지금 집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사는 집이 영 사람이 못 살 곳은 아니다. 좀 작아도 방이 ‘셋’이고, 화장실도 ‘둘’이나 있으니 모양새는 갖추었다. 사실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집을 세련되게 꾸미거나 깨끗이 정리하는 타입이 아니다.
아내나 나는 집이 정리가 안 되어 있거나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으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정작 청소하는 건 굉장히 힘들어한다. ‘아니, 청소하기 싫으면 어지르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절로 나오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이런저런 물건들이 집 안에 제자리를 잡지 못한 채 창고 더미처럼 쌓여만 가고 있다.
카페 '독서토론 가족모임 케' 사진 캡처
설상가상으로 딸애는 온 집을 어지럽히는데 그 수완이 대단하다. 마치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서 사자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모종의 작업을 하듯이 온 집 곳곳에 자신의 체취를 뿌려둔다. 그게 딸애가 신었던 양말인지, 코 푼 휴지인지, 먹다 남은 요구르트인지, 바닥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인지, 만들고 남은 레진 아트인지 알게 뭔가.
더 위대한 면모는 그 쓰레기 더미 위에 앉아 있어도 전혀 위축됨이 없는 위풍당당함이다. 오히려 자신이 자주 쓰는 갖가지 도구나 재료들이 눈에 잘 띄어 작업(?)에 도움이 된다고 큰소리친다.
다들 이모양이니 한시도 집이 정돈된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런데 나와는 달리 아내는 이 결과의 원인은 집이 좁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넓어야 정리도 되고 숨길 건 숨길 수 있다는 판단이다. 결과에 대한 원인이 다르니 해법이 다를 수밖에.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아내와 내가 대화를 시작하면 언제나 ‘시사토론’처럼 상대에 대한 비방전으로 시작해서 끝은 '종전회담'에 서명하는 장군들처럼 비장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던 이 문제가 종착점을 맞이하게 된 것은 역시나 우리 집 ‘미다스의 손’인 딸애의 한 마디 덕분이었다. 올해 초, 같은 반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받아 갔다 온 날이었다.
“친구네 집에 갔는데, 거실도 넓고 정말 예쁘게 꾸몄더라. 우리 집 하고는 비교도 안돼. 창피해서 우리 집에는 친구들을 초대 못 할 것 같아.”
세상에나, 기가 막혀서! 거실에 있는 책상과 책장에 아무거나 마구 올려놓는 게 누군데? 거실 바닥에 있는 과자 봉지, 아무렇게 벗어 놓은 양말과 마스크, 쓰다 팽개친 사인펜과 종이 조각들. 다 니가 한 거야!
나는 딸애에게 분노의 펀치를 마구 날렸지만, 딸애의 무덤덤한 표정에 기가 질려 링에 수건을 던지고 포기패를 선언하고 말았다.갑자기 의욕이 빠지고 지금껏 쌓아 온 많은 것이 무의미한 물거품이 되어 날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자식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부모, 형제에게도 할 말 다하고 인생의 동지인 아내 하고도 난상토론을 벌였던 나였는데, 철없이 지껄인 아이의 한 마디에 모든 게 부질없어졌다.
돈이 없어 좁은 집에서 지저분하게 사는 게 아닌 걸 딸애에게 확인받고 싶어졌다. 어쩌면 잠재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나 자신의 ‘어린아이’가 깨어나 어른이 된 나를 비난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좀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라고.
그렇게 해서 한 달 전부터 주말마다 정리의 달인이 집에 나타났다. 먼저 거실부터 시작했다. 막상 해 보니 정리라는 게 무슨 대단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저 작심하고 버리는 것!
지금까지 그 작심을 못해 계속 쌓아둔 그 많은 것들, 십 년 전 취업 공부하면서 정리해 두었던 각종 수험서와 자료들부터 지금은 안 보지만 혹시나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 놔둔 책들. 특히 아이가 크면서 더 이상 보지 않는 유아 책들이 수백 권이나 되었다.
하긴 이삿짐센터와 계약할 때 견적 주시던 팀장님 말씀이 명언이다.
“고객님 댁은 같은 평수의 다른 집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이 짐이 있어요. 워낙 성격이 꼼꼼해서 짐 정리를 잘하셨나 봐요. 이 많은 짐들을 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한 마디로 쓰레기 더미 위에서 살고 있었다는 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잘 살아준 아내와 딸애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판이다. 안 보는 책들을 버리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오래된 책상과 책장도 버렸다.
그다음은 딸애 방, 베란다. 이런 순으로 한 곳씩 정리해 나갔다. 정리하면서, 아니 갖가지 물건들을 버리면서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어느 것 하나도 추억이 없는 것은 없었다. 딸애와 같이 만들었던 클레이는 서랍장 구석에서 돌처럼 굳어 있었고, 행운을 준다고 호들갑을 떨며 코팅했던 네 잎 클로버는 보지 않은 책들 사이에서 버려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많은 것들이 우리 집에 올 때는 나름 필요해서 왔었을 텐데, 지금 와서 보니 그 의도대로 쓰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 무계획이거나 과욕이었다.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외부의 자극에 귀 기울였다. 내 기준이 아닌 타인들의 걸음걸이에 맞추려고 했었나 보다.
모든 것은 그 흔적을 남긴다. 책장 뒤로 쏟아져 굳은 주스 자국도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날 딸애가 웃으면서 떠들다가 떨어뜨린 컵과 그런 조심성 없음을 야단치던 내 모습. 켭켭히 쌓인 먼지와 얼룩을 닦았다. 걱정과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게 깨끗해졌다. 정말 찌든 얼룩은 제거제를 뿌리고 잠시 기다려 주니 쓱쓱 말끔해졌다. 기다려주면 깨닫게 되는 거였는데.
나는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외부 세계만이 아닌 다른 차원이 있다고 믿는다. ‘나’라는 존재의 내부에는 오감으로 인식할 수 없는 무한의 다중우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신기해서 많이 보았던 ‘만화경’처럼, 그 속에는 같은 모습이 겹치거나 부서지지만 또한 들여다볼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내'가 있다.
만화경
실수하지 않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살다간 곧 지칠 것이다.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나의 생각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의결실을 거두기까지는 아직도 갈길이 멀기에 때로는 여유가 필요하다. 지금의 나는 자연이 준 단풍과 시리도록 맑은 하늘과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빛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을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으나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온전히 지금 이 시간과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외부 세계의 물질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모아 두고 쌓아두고 무너뜨렸던 많은 짐들이 내 맘속에 마구 흩뜨려져 있다. 이것들도 정리가 필요하다. 불필요한 것은 버려야 한다. 과욕과 무계획이 낳은 지난 세월의 흔적을 닦아서 마음의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
다만 버려야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다. 나를 괴롭히는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잘 버릴 수 있다면 내 인생은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