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 나서야

by 정자까야

겨울씨. 오늘 하루 어땠나요? 함께 하지 못해 아쉽지만 겨울씨가 만족한 하루였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비가 올 듯하네요..감기 조심하세요. 또 연락할게요.

글을 다 적고 마지막에 전송할지 잠시 고민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통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여름은 겨울에게 카톡을 보냈다.

카톡.

그 미약한 소리가 들렸을 리가 없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공연이 한창이었다. 왜인지 모른다. 그걸 설명할 수는 없다. 왠지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었다. 환청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무엇인가 분명 들린 것 같았다. 건강검진 청력 검사를 받을 때 삐..들릴 듯 말 듯한 그런 소리. 겨울은 어두운 조명에서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발신인이 여름임을 알고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겨울은 빛이 새나가 공연에 방해가 될까봐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여름의 메세지를 확인하고 바로 답장을 적었다. 행여 여름이 오래 기다릴까봐 답신하는 마음이 급했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하고픈 말은 거의 하지 못한 채 답변을 하고 말았다.

네 여름씨. 오늘 전 잘 지냈어요. 여름씨의 하루는 어땠나요? 제 시간보다 여름씨의 시간이 더 신경쓰인 하루였습니다. 여긴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한데 아직은 괜찮아요..

여름은 차를 모두 마셨지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비가 내리는데 우산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겨울의 연락이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거기가 어딘데..아직 비가 안오나요? 여기는 이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겨울도 공연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서 서성이며 연락을 기다렸다.

여기는..광화문이에요. 이제 막 헤어져서..저도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요.

겨울은 거짓말을 문자로 보내는 것이 거짓말을 말로 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걸 느꼈다. 말은 나오는 순간만 마음에 걸리지만 글은 이후에도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가 없게 됐다. 영화 제목마냥 어쩔 수가 없다..

그래요? 그럼 아주 잠시만 기다릴 수 있어요? 저도 마침 종로쪽이라..거리에서 잠깐이라도 보면..그것도 좋잖아요. 우연 같기도 하고..

여름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적어 보냈다.

좋아요. 그럼 어디서 보죠? 정말 거리에서 봐요?

네..잠깐이면 되니까. 광화문 광장..이순신 장군 동상 앞 어때요?

겨울은 이 와중에도 여름의 엉뚱한 발상에 웃음이 났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이라니. 장군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알겠다고 답신을 했다. 그리곤 공연장으로 들어가 짐을 챙겨 서둘러 나왔다. 택시를 호출했다. 마음이 급했다. 자신은 지금 이미 광화문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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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겨울의 답장을 받자마자 계산을 하고 지하철역으로 뛰었다. 다행히 비가 잦아들었다. 내리는 폼이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였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쪽으로 향했다. 택시보다 그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또 전력으로 달렸지만 여름이 도착했을 땐 통화 후 30분 가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겨울은 땀 투성이의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막상 오려니..생각보다 멀었어요. 여름은 아직도 가쁜 숨을 간간히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전화해서 다음에 보자고 하지..제가..이렇게 뛰면서까지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인가요? 겨울은 여름이 안쓰럽고 걱정이 됐다.

네..그럴만한 사람 맞아요. 여기가 서울이라 감동이 덜한 거에요. 파리나 런던이라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그런 마음으로 달려왔어요. 파리나 런던이었으면..오늘 못보면 언제 볼지 기약할 수 없으니까.

겨울은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바쁜 일정이 여름에게 그런 절실함을 느끼게 한 듯 해 마음이 아팠다.

어디 있었던 거에요? 삼총사 분들 만난 거에요? 겨울이 물었다.

아..네..개네들은 아니고..대학 친구를..종로쪽에 있다가..여름은 얼버무리며 말했다. 말이 길어지면 거짓말이 자꾸 꼬일듯했다.

얼굴 봤으니 됐어요. 겨울씨 빨리 들어가요. 언제 또 비올지 몰라요. 비 안올 때 일찍일찍 가자구요. 여름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겨울은 여름과 더 있고 싶었다. 아직 카페는 문을 닫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여름을 위해 끝까지 거짓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의 오늘 행적을 여름이 안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왜 부르지 않았냐고 서운해할까 아님 자신은 가을의 대타가 아니라고..자존심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얘기할까..어느 쪽이든 입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여름이 지하철을 탄다고 해서 겨울은 택시를 잡겠다며 돌아섰다.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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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었고 땀으로 범벅됐던 여름의 머리도 흩날렸다. 겨울은 등을 돌려 이순신 장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대형 건물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으며 왼편으로는 카폐의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을 오가는 몇 몆 행인들과 줄지은 자동차들. 그것이 여름의 시야에 들어온 광경이었다.

다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현수막에 써 있던 문구. 여름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마치 누군가 여름의 고개를 옆으로 비튼 것마냥 여름도 모르게 그 문구를 보게 됐다.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무엇인가 여름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가슴을 심하게 조여왔다. 꽃이 지고 나서야..그제서야 그 때가 봄이었음을 깨닫는다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데..어쩌면 난 내일 눈을 떠 오늘이 봄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아닐까.

여름은 뛰었다. 겨울은 여름의 음성이 들려 걸음을 멈췄다.

거짓말이에요..

겨울은 고개를 돌려 여름을 보았다.

거짓말이었어요. 다..모두 다..

전..오늘 하루를 폐인처럼 보냈어요. 겨울씨를 만나지 못한다는 실망감에. 겨울씨를 이대로 보내줘야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젠 정말 한계가 온 게 아닐까 그런 망상에 시달려서는..오늘 하루를 겨울씨와 함께했던 장소를 추억하면서..카페를, 여의도 공원을, 겨울씨가 일했던 매장을..그 인근의 찻집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쏘다녔어요..

여름은 겨울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허공을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겨울씨. 겨울씨한테 더 멋있는 남자이고 싶었는데 이렇게 홀로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약해지고 바보같이 작아졌어요.


여름의 호흡이 순식간에 가빠졌다.


끝까지 가면을 쓰고 싶진 않았어요. 미안해요. 솔직하지 못해서..그냥 겨울씨 너무 보고 싶었다고..말하고 싶었어요. 가지 말고 나랑 커피 한 잔 하자고..얘기..

여름은 말을 끝내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의 얼굴을 뒤덮은 것이 눈물인지 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겨울도 한동안 여름과 함께 비를 맞았다. 그리고 여름이 진정된 모습을 보이자 그제서야 들고 있던 우산을 펴서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만의 공간을 나눠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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