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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미술관

by baekja

누구에게나 하나쯤 취미가 있을 겁니다. 제 취미는 미술관을 다니는 겁니다. 머리가 복잡해 공부가 너무 안 되는 날이거나 기분이 우울한 날이면 보통 미술관을 갑니다. 내키면 미술관에 적혀 있는 설명을 보며 미술 작품들을 분석해보기도 하고 글자 한 자 보기 싫은 날이면 그냥 색채와 형태 또는 다른 여러 가지 매체들을 통해 제게 다가오는 감각들만 느끼고 미술관을 나오기도 합니다. 올레길을 완주할 때도 하루 정해진 코스를 다 걷고 남은 시간에는 주변의 미술관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올레길을 걸으면서 방문했던 이 미술관들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미술관 소개의 시작은 6코스 이중섭 거리에 위치한 이중섭미술관으로 해야겠습니다. 이중섭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고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이중섭 작가의 <소>는 미술에 문외한일지라도 우리나라 사람이면 한 번쯤 책에서 보았을 만한 작품이죠. 이중섭 작가는 1951년 6·25전쟁의 포화를 피해 1·4후퇴 당시 원산에서 부산을 거쳐 제주도 서귀포에 도착하게 됩니다. 서귀포에서의 삶은 매우 고달팠습니다. 자신과 아내, 아들 두 명까지 총 네 명의 가족이 겨우 누울 정도의 좁은 방에서 살아야했고 먹을 것조차 넉넉지 않았죠. 하지만, 이 시기가 이중섭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한 남쪽에서 전란의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결국 가난을 해결하지 못해 같은 해 12월에는 부산으로 올라가야 했고 다음 해에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때 이후로 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졌고 그는 1956년 4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합니다. 작가의 짧은 인생에서 1년간의 제주 생활은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가 늘 그리며 나타내는 유토피아에 가장 가까운 시기이기 때문이죠. 그의 인생에서 매우 짧았던 제주에서의 행복을 상상하며 복원된 이중섭 주거지를 살펴보고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면 그가 생각했던 이상향의 편린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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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주거지와 이중섭미술관


서귀포시립기당미술관은 7코스에 위치한 삼매봉 자락에 위치한 미술관입니다. 제주가 고향인 재일교포사업가 기당(寄堂) 강구범에 의하여 건립되어 서귀포시에 기증되었으며 1987년 7월 1일 개관하였죠. 기획전시실과 상설전시실로 나뉘어 있는데 기획전시실은 다변하는 현대 미술의 흐름을 지역 주민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전시가 열리고 있고 상설전시실에는 ‘폭풍의 화가’로 알려진 변시지 작가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제주에서 태어난 변시지 작가는 황토빛의 그림으로 토속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파도나 나무, 말 등을 통해 강렬하게 바람을 묘사하고 있죠. 돌담과 초가, 사람의 모습을 보면 바람의 섬인 제주를 전통적인 이미지를 섞어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렬한 바람이 가득한 제주를 사람의 고뇌와 함께 그려낸 변시지 작가의 작품이 보고 싶다면 기당미술관에 방문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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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당미술관과 변시지 작가의 작품


변시지 작가 말고도 제주를 잘 표현한 현대 작가가 한 명 더 있습니다. 6코스 정방폭포 옆 왈종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이왈종 작가입니다. 제주 출생은 아니나 1990년대 초부터 제주에 내려와 ‘제주생활의 중도’ 시리즈를 그리며 제주의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잘 표현하고 있는 작가죠. 작가가 말하는 ‘중도(中道)’는 불교적 개념의 중도에 가깝습니다. 양극단의 의견을 절충한 중립의 입장이 아닌 양극단의 의견을 넘어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을 모두 포용하는 조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따로 나누지 않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밝은 분위기 속에서 평화롭게 서로 얽혀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죠. 작가의 그림 속에 표현된 이상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며 제주의 자연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의 힐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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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종미술관과 이왈종 작가의 작품


6코스에서 정방폭포를 나와 소암로를 따라 걷다가 서귀포초등학교를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기 전에 오른쪽에서 소암기념관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서귀포 출신인 소암(素菴) 현중화 선생은 한국 근·현대 서단의 대가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기려 2008년에 소암기념관이 세워졌죠. 상설전시실에서는 소암 현중화 선생의 일생에 따라 변화한 서예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고 기획전시실에서는 제주와 관련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수묵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념관을 방문하면 고매하고 묵직한 수묵의 느낌이 제주 여행에 더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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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암 선생의 흉상과 서필


13코스의 종점 저지리는 아름다운 저지오름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제주예술인마을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많은 예술인들의 주거지와 작업실뿐만 아니라 다양한 갤러리와 미술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미술관으로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물방울 화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김창열 작가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은 6ㆍ25전쟁 때 1년 6개월가량 제주도에 머무르며 작품 활동을 한 이후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긴 김창열 작가가 작품 220점을 기증하면서 건립이 추진됐습니다. 전시되는 작품은 매번 바뀌지만, 대부분의 전시에서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니 김창열 작가를 좋아한다면 방문하기를 바랍니다.


20210122_132952.jpg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내부


김창열 작가의 작품에서 물방울은 자연이자 근원으로의 회귀이고 끝없는 순환의 상징입니다. 그의 기억 속에 비극으로 자리 잡은 6·25 전쟁과는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죠. 무척 사실적인 그의 물방울은 자연의 이미지를 넘어 자연 그 자체를 담아내며 인간이 벌이는 파멸적이고 혼란스러운 사건들과는 달리 매우 평화롭고 순수합니다. 이 물방울을 통해 인간은 변해버린 현재의 상태에서 자연이라는 근원으로 회귀하고 이러한 과정은 순환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죠. 이런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자연과 합일하는 느낌은 작품뿐만 아니라 묵직한 느낌을 가지는 미술관 건물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조용히 한 걸음 한 걸음 건물과 작품의 분위기를 느끼며 미술관을 거닐고 나오면 마음속에 평화와 안정이 가득 차리라 예상합니다.


20210122_132722.jpg 김창열 작가의 작품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을 나와 천천히 예술인마을을 거닐다보면 제주현대미술관 본관에 닿을 수 있습니다. 제주현대미술관 본관 입구에는 최평곤 작가의 <여보세요>라는 작품이 반겨주죠. 마치 관람객들을 어서 들어오라며 환영하는 듯합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대부분 제주와 관련된 현대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상설전시실에는 김흥수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갔을 때는 김흥수 작가의 전시가 열리지 않고 있어서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시간이 남지 않아 분관까지 가지 못했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분관까지 가서 현대의 미술 작가들이 제주를 어떻게 표현하고 담아냈는지 보기를 추천합니다.


20210122_140443.jpg 제주현대미술관 본관


18코스 초반에 산지천을 따라 걷는 구간이 있습니다. 산지천을 따라 걸을 때 우측에는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2가 있고 좌측에는 산지천 갤러리가 있습니다. 제가 올레길을 걸을 때는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2가 임시 휴관을 하고 있어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개장을 하였으니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모텔을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2를 방문하길 바랍니다. 동문모텔과 산지천을 두고 마주하고 있는 산지천갤러리는 녹수장, 금성장이라는 이름의 여관 건물을 재생하여 만들었고, 흔히 생각하는 갤러리와는 달리 넓은 전시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제주와 관련된 여러 전시회를 열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20210126_175825.jpg 왼쪽의 빨간색 건물이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2, 오른쪽 긴 굴뚝을 달고 있는 건물이 산지천갤러리입니다.


저는 미술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을 담아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시각은 분명 자신이 겪은 경험과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제주에 있는 미술관들은 제주라는 특수한 공간적 배경에서 겪은 색다른 경험들을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으로 녹여 낸 작품들이 가득합니다.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들을 감상하고 감탄하는 것도 좋지만, 미술관을 이런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담아낸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올레길을 걸을 때 올레 코스 근처의 미술관을 방문하여 나와는 전혀 다른 시선을 통해 전혀 상상치 못했던 제주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보는 즐거움을 느껴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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