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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일제강점기 군용 시설

by baekja

올레길에 있는 오름들을 걷다보면 뜬금없이 동굴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제주도에만 거대한 개미가 살았던 것도 아니고 왜 오름들마다 동굴이 파져있는 걸까요?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표지판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일제 동굴진지.’ 일단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만들어졌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이런 동굴진지를 찾아볼 수 없죠. 똑같이 조선의 땅으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는데 왜 제주도에만 이런 것들이 있는 걸까요? 그리고 이 동굴들은 어디에 쓰인 걸까요? 이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1940년대의 역사를 살펴봐야 합니다.


진주만 습격으로 자신감 있게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던 일제는 미드웨이 해전으로 패퇴를 계속하며 1944년에는 괌과 필리핀을 차례로 내주게 됩니다. 이에 미군의 일본 본토 공략이 얼마 안 남았음을 깨달은 일본군 지도부는 ‘본토결전작전대망(本土決戰作戰大網)’을 결정하여 미국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총력을 결집시킨 결전을 지시합니다. 여기서 나온 작전이 ‘결호작전(決號作戰)’으로 미국이 일본으로 상륙할 수 있는 7개 지역을 정하여 이 지역의 요충지를 요새화하는 작전입니다. 7개 지역은 북쪽의 사할린섬부터 홋카이도지역, 동북지역, 관동지역, 동해지역, 중부지역, 큐슈지역, 그리고 한반도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이 중에서도 미군이 상륙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예상되는 결1호작전에 포함되는 홋카이도와 결7호작전에 포함되는 제주도는 많은 전력증강이 이루어졌습니다.


1945년 1월에는 1천명을 넘지 않았던 제주도 주둔군은 1945년 8월에는 7만 여명까지 늘어났습니다. 또한, 중국 침략을 위해 중간 거점 해군항공기지로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을 더욱 확장하고 현재 제주공항으로 사용되는 육군서비행장(정뜨르비행장)과 육군동비행장(진드르비행장)을 만들고 여기에 더해 조천면 교래리에 현재 정석비행장으로 사용되는 비밀비행장을 만들어놨습니다. 비행장말고 동굴진지도 이때 만들어지는데 해안가의 동굴진지는 상륙하는 미군 함선에 자살 공격을 할 소형함정과 폭약을 숨겨놓는 용도였고, 오름 중턱의 동굴진지는 미군의 폭격과 상륙 후 있을 공격에 대비하는 용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굴진지와 같은 일제 군사 시설은 제주도내 370여개의 오름체 가운데 120여 곳에 구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120여 곳이나 되는 오름에 군사 시설이 있다 보니 올레길을 지나면서도 위에서 말한 다양한 군사시설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말할 곳은 1코스의 성산일출봉입니다. 흔히 알고 있는 성산일출봉 정상가는 길에서는 이 동굴을 보기 힘들고 성산일출봉 매표소를 지나쳐 나와 수마포에 이르면 성산일출봉 측면 아래에 구멍들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마저도 성산일출봉의 장대한 아름다움에 취하면 보기 쉽지 않지요.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어도 가까이 다가가볼 수 있습니다. 다가가서 보면 콘크리트 동굴이 성산일출봉에 박혀 있는 형태를 띠고 있어 무척 안타까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KakaoTalk_20211114_171105373.jpg 성산일출봉 일제 동굴진지


그 다음 동굴진지는 7코스 삼매봉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실 평화로운 삼매봉을 오르거나 내리면서 볼 수는 없고 삼매봉에서 외돌개 가는 길에 있는 삼매봉 아래의 황우지 해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는 없지만, 동굴은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산일출봉이 잘 정돈된 현대식 콘크리트 동굴 같은 느낌이라면 황우지해안의 동굴은 외국의 고대 동굴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인공 암벽 동굴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20210114_091300.jpg 황우지해안 일제 동굴진지


9코스의 월라봉에서는 해안가에 있지 않은 산 중턱의 동굴진지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월라봉 동굴진지 주변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무척 으스스하고 을씨년스어러운 느낌을 줍니다. 입구가 막혀있지는 않지만, 도저히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입구 가까이 다가갔다가 콘크리트 벽을 가득 메운 고사리 사이로 새가 울며 뛰쳐나오자 친구랑 같이 깜짝 놀라며 절대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20210116_100148.jpg 월라봉 일제 동굴진지


10코스 송악산은 해안가와 오름 중턱에 모두 동굴진지를 가지고 있죠. 알뜨르 비행장 가까이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취급받아 이렇게 많은 동굴진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간혹 1980년대 제주도 신혼여행 사진을 보면 바다 보이는 동굴에서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에서 찍은 것입니다. 2000년대 초반에 와서야 이 동굴들이 전에 어떻게 쓰였는지 널리 알려졌으니 ‘그랬을 수 있다.’라고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전쟁의 상징이었던 동굴이 유명한 사진 포인트였다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집니다.


20210117_112511.jpg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


송악산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바로 자그마한 알오름 세 개가 있는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 세 개의 알오름 중 서쪽 오름이 섯알오름이며 동쪽 것은 동알오름, 가운데 것은 셋알오름입니다. 셋알오름에는 동굴진지와 고사포진지가 있는데 저는 동굴진지는 찾지 못하고 고사포진지만 볼 수 있었습니다. 셋알오름에 고사포진지를 세운 이유는 알뜨르 비행장을 폭격하는 전투기들을 상대로 알뜨리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고사포진지에 이제 고사포는 사라지고 거대한 원형 콘크리트 구덩이만 남아있죠. 그래서 고사포진지보다는 예전에 숲속에 숨겨두었던 비밀 회의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셋알오름과 이어진 섯알오름을 내려오면 섯알오름 양민학살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4.3사건 비극의 상징이었던 이곳은 이전에는 제주도 최대의 일제 탄약고로 쓰였다고 합니다.


20210117_123637.jpg 셋알오름 일제 고사포진지


양민학살지를 벗어나자마자 이제 강력한 바람과 함께 제주에서 보기 힘든 너른 들판이 여행객을 반깁니다. 알뜨르에 도착한 것이죠. 알뜨르에 도착하면 평화를 사랑하는 여러 조형물, 넓은 밭과 함께 자그마한 언덕들이 보입니다. 바로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입니다. 미군의 폭격을 견디기 위해 견고하게 지어진 격납고는 이제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증명하는 문화재임과 동시에 평화를 말하는 미술 작품들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든든한 보호소가 되고 있습니다.


20210117_131233.jpg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넓게 이어진 밭을 보면서 바람을 뚫고 나아가다 보면 알뜨르 비행장이었던 흔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파릇파릇한 작물들 가끔 보이는 무너져 가는 콘크리트 더미들은 이곳이 과거에 어떤 곳이었는지 증명하고 있지요. 뼈대만 간신히 남은 관제탑 아래를 지나면 이제 길이 약 30m의 기다란 언덕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 지하벙커입니다. 이곳은 비행대 지휘소나 통신시설로 쓰였다고 합니다. 입구가 열려 있기는 하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20210117_131905.jpg 알뜨르 비행장 관제탑


12코스 수월봉에도 동굴진지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엉알길 옆 음침한 느낌을 주는 동굴진지가 어색한 느낌을 주지요. 제주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찾는 18코스 사라봉에도 동굴진지가 있습니다. 예전에 동굴의 용도를 모를 때에는 동굴에 들어가면 귀신들려 나온다는 등의 소문이 근처 지역민들에게 돌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함덕 해수욕장과 조천 북촌리 사이에 있는 19코스 서우봉에도 동굴진지가 있습니다.


20210128_085527.jpg 사라봉 일제 동굴진지


올레길 곳곳에 있는 일제 군용시설을 보면 당시 전쟁의 긴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이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과 일본군을 합친 사망자 수보다 오키나와 민간인의 사망자 수가 더 많았습니다. 또한, 당장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제주도 민간인 수가 상당했음을 생각해보면 9월에 예정되어 있었던 제주도 상륙 작전이 이루어졌을 시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을지 가늠이 가지 않습니다. 이젠 폐허나 유적지가 되어버린 군용 시설들이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1945년 8월 15일 제주 또한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일제에게 자신이 오늘 채취한 수산물을 빼앗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일제의 군용 시설을 만들기 위해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만, 제주도라는 좁은 섬에 모여 있는 일본 주둔군이 7만 명이 넘었으니 그 강제력 때문에 실질적인 제주의 광복은 조금 뒤늦게 찾아왔습니다. 일본군이 완전히 후퇴하여 제주도가 제주민의 손으로 들어간 것은 10월 이후입니다. 조금 느리긴 해도 찾아온 광복에 이제는 살만해질 것이라며 즐거워하던 제주민들은 한국 근현대사 역사상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제주 전역을 휩쓸었던 이 사건은 올레길 위에서도 관련 유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다음의 글에서 말할 4.3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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