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제주도가 등장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삼국 시대 때는 아예 삼한과는 다른 오랑캐의 하나로 취급했고, 고려 시대에 와서야 중앙정부에 편입되었으며, 아예 중앙 정부와 통일된 문화를 이식받은 것은 16세기 이후라고 봐야할 정도죠. 그래서 제주의 역사는 흔히 아는 한국사와는 약간 다릅니다. 한반도의 기원이 단군신화에 있다면 제주도의 기원은 설문대할망이야기나 삼성신화에 있죠. 이 글에서 제주사를 전부 설명하면 제주올레 완주기와는 너무 동떨어질 것 같아 제주올레길을 지나면서 보게 되는 곳을 중심으로 적당한 선에서 우리가 몰랐던 제주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전 글 <돌>에서 소개했던 고산리와 삼양동 유적의 시대를 지나면 이제 우리는 ‘탐라’라는 국가가 세워지는 시대를 보게 됩니다. 원래는 ‘삼성혈’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나 올레 코스가 지나지 않으니 2코스 혼인지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혼인지는 사실 평범한 연못입니다. 다만 이곳에서 누군가 혼인을 했던 것이 중요합니다. 신화에서 말하는 여기서 혼인한 부부는 총 세 쌍입니다.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라는 삼성혈에서 나온 세 명의 신인(神人)과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건너온 세 명의 공주(公主)가 결혼한 것이죠. 이들이 결혼하고 정주하며 농경생활을 한 것이 신화에서는 인간생활의 시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추측하면 권력 있는 세 부족이 권력이 조금 낮은 부족들을 규합하여 탐라국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신화는 제주 고씨, 제주 양씨, 제주 부씨의 기원이 되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원래는 한반도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한반도의 힘이 강대해지면서 자연히 탐라는 고려시대부터 한반도 아래로 편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길고 긴 수탈의 역사가 시작되죠. 귤부터 해산물까지 다양한 특산품들을 제주에서 중앙으로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생긴 ‘육지 사람’에 대한 악감정은 제주 역사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악감정이 전면으로 드러나는 시기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대몽 항쟁기의 마지막 시기인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으로 가야 합니다.
고려 정부가 몽골 제국에 항복하고 몽골과 손을 잡고 무신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단행합니다. 최씨 무신정권의 친위부대이던 삼별초가 출륙환도를 거부하자 해산 명령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삼별초는 이에 저항하여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향합니다. 그러자 제주도에 먼저 와 있던 고여림의 고려 정부군이 환해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환해장성이 완성되기 전 삼별초가 도착해 고여림의 군대를 격퇴하고 여몽 연합군을 막기 위해 환해장성을 마저 쌓습니다. 그것이 지금 해안가 올레길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환해장성의 기원입니다.
1271년 말 빠져나온 삼별초는 1273년 2월까지 여몽 연합군을 상대로 버티다가 16코스에서 볼 수 있는 항파두리성에서 패배를 맞이합니다. 이미 강화도와 진도를 거치며 힘을 다수 잃었을 삼별초가 이렇게 긴 시간동안 정규군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제주 민중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수탈해가는 고려 정부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제주 민중들이 고려 정부에 대항하는 삼별초를 지지해준 것이지요. 그래서 환해장성의 돌무더기나 항파두리성의 높은 토벽을 보고 있노라면 삼별초의 저항도 생각나지만, 당시 제주 민중의 고통이 가장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삼별초의 항쟁 이후 제주가 탐라총관부로 지정되고 다루가치라는 원나라 관리가 들어와 지배함에 따라 많은 몽골인들이 정착합니다. 그러면서 제주민들과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경우도 늘어났죠. 그 과정에서 원나라에 공물로 바칠 말을 기르기 위해 목장이 다수 생기고 이를 관리하는 몽골인인 목호(牧胡)들이 생겨납니다. 이들이 기른 말과 같은 공물들은 5코스의 망장포구 같은 곳을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그렇게 제주가 다시 안정되어 갈 때쯤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합니다. 중국의 중심은 명나라가 되었고 이번엔 명나라에서 제주도의 말을 요구합니다. 이에 몽골인들이 기른 말을 명나라를 위해 줄 수 없다며 일으킨 난이 목호의 난입니다.
1374년 이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서는 최영 장군과 함께 314척의 배와 25,6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합니다. 이후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파견한 군사가 약 5만여 명인 것을 생각하면 고려 정부가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각종 SNS를 통해 무척 아름답다고 알려진 14코스의 협재해수욕장에서 보이는 비양도를 통해 제주도에 상륙한 최영군은 목호군을 격퇴하며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던 잔당들을 섬멸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목호군이 제주를 횡단하며 오랜 기간 버텼다는 것입니다. 이미 약 100년 동안 함께 살며 제주민이 되어버린 목호군을 괴롭히는 육지 사람들로 고려 병사들을 인식하고 토착 제주민들이 목호의 난을 도운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수탈을 계속하는 육지 사람에 대해 제주민들의 원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죠.
목호의 난 이후 고려는 빠르게 쇠락하고 조선이 세워졌습니다. 제주는 조금 더 중앙의 강력한 입김을 받게 되었죠. 하지만, 조선 초창기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앙의 수탈보다 바다 바깥쪽에 있었습니다. 바로 왜구의 침입이었죠. 이에 대해 조선 정부에서 직접 지침을 내려 봉수를 통해 연락을 취하는 연대와 주변을 지키기 위한 요새인 진성을 설치하고 환해장성을 보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올레코스를 걷다보면 무수히 많은 연대를 볼 수 있고 9개의 진성 근처를 모두 지나갑니다. 다만, 9개의 진성 중 모슬진성은 터였다는 비석만 남아있고 차귀진성 또한 터만 남아있으며 비교적 형태가 잘 남은 명월진성이나 수산진성은 올레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니 참고하길 바랍니다. 이런 건축물들은 분명 왜구를 막는데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먹고 살기도 바쁜 제주민들을 동원하여 강제 노역을 시켜 제주민들에게 원망을 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혼란 속에서도 제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1416년(태종 16)에 3읍 행정조직을 도입합니다. 한라산 동서로 뻗은 분수령을 경계로 북반면을 제주목으로 하고, 남반면은 이를 다시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을 정의현, 서쪽을 대정현으로 하였습니다. 성읍민속마을이 있는 정의현성이나 추사 적거지가 위치한 대정현성은 올레길에서 만날 수 없지만, 제주목 관아는 만날 수 있습니다. 17코스의 종점 가까이에 있는 제주목관아와 그 옆의 관덕정은 이곳이 이미 오랜 시간 제주의 중심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죠. 제주의 역사를 증언하는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앞의 광장에서는 과거 시험, 잔치 등 제주의 각종 큰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제주목 관아는 중앙에서 파견된 제주 목사가 상주하는 곳이고 정치를 펼치는 곳입니다. 몇몇 존경을 받는 목사들도 있었지만, 19세기 이후로는 대부분의 목사가 제주를 수탈하고 중앙에 뇌물을 바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자연히 제주 민중들의 분노는 늘 제주목 관아로 향했습니다. 1813년의 민란, 1862년 임술농민봉기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민란, 1896년 제주유생들의 민란, 1898년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제주에 내려와 살다 가혹한 세금에 못이겨 일으킨 방성칠 주도의 민란, 1901년 천주교인들과 세금을 걷는 벼슬아치들이 결탁하여 벌인 횡포에 못 이겨 일으킨 이재수의 민란 등 모든 민란의 최종 목적지는 제주읍성 안의 제주목 관아였습니다. 이런 민란을 제압하려 늘 조선 정부에서는 안핵사(按覈使)를 내려보내 주동자를 처형하고 제주읍성이나 관아 앞에 효수하였습니다. 이렇게 안핵사가 민심을 진정시키고 떠나도 그 때뿐 계속해서 중앙의 횡포에 시달리는 제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서 민란을 일으켜야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육지라 불리는 중앙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겠죠.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인 4.3사건까지 겹쳐 제주 사람들은 원래부터 그랬듯 한반도의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을 ‘육지 사람’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 가서 한 할머니께 육지 사람이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죠. 지금이야 경계심도 적고 원망의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이 말은 원래 제주도에 늘 피해를 가져다주는 이방인과 자신들을 구분 짓는 말이었습니다. 올레길 1-1코스를 걷다가 하고수동 해수욕장에서 ‘안녕, 육지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를 봤습니다. 무척 새로운 느낌이 들더군요. 과거부터 겹겹이 쌓아올려진 아픔의 역사를 대변하는 말이 이제는 관광객을 환영하는 말이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역사와 육지 사람이 가지는 말의 의미에서 볼 수 있듯 제주의 역사는 대부분 육지의 수탈과 공격에 대한 저항의 역사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한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공격을 받아온 변두리의 역사죠. 현재는 제주도에 사는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달고 살지만, 멀지 않은 과거에서는 자신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공유하는지 모르는 경계에 위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올레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역사 관련 유적을 만날 때마다 ‘제주는 한국이었지.’라는 생각에 앞서 한국이라는 경계 안으로 포섭되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길을 걸어왔는지 한 번 쯤 생각해주셨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