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을 다녀오면 기억나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분명 현무암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륙에 가득한 화강암의 색깔과는 확연히 다른 진한 검은색과 송송 뚫린 구멍이 인상적이지요. 또한, 만들어진지 오래된 한반도와는 달리 제주도는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반도에 돌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흙이 다수 있는 것과 달리 제주도는 흙보다는 돌이 더 많이 보이는 편입니다. 제주의 삼다(三多)에 돌이 들어가는 것도 당연해 보입니다.
흔히 이런 제주의 현무암을 보고 드는 생각은 ‘많다, 예쁘다, 신기하다.’ 일겁니다. 지금에야 하나의 관광자원과 상징으로 현무암이 인식되고 있지만, 원래 제주는 이 현무암 때문에 불모의 땅이었습니다. 돌만 많고 흙은 없어 농사지을 곳은 한정되어 있는데 현무암에 난 구멍 때문에 물은 잘 모이지도 않으니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되었죠. 그래도 이 돌을 극복하고 이용하며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불모의 제주도에서 살아왔습니다.
빌레못 동굴 구석기 유적에서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제주도에서 사람들이 살아왔음이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주올레 코스는 거기에 닿지 않기에 제주에서 현무암과 함께한 역사는 한경면 고산리 유적에서 시작합니다. 고산리 유적도 원래는 코스에 없습니다. 다만, 12코스에서 자구내포구를 지나 당산봉으로 들어가기 전 뒤를 돌아본다면 농지 가운데에 웬 건물이 하나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곳이 제주 고산리 유적안내센터입니다. 눈으로 보기엔 가까워보이는데 길은 꽤 돌아가야 해서 제주올레 코스에는 포함되지 않은 듯합니다. 돌아가기는 해도 그리 멀지는 않으니 역사에 관심 있으신 분은 한 번쯤 들려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라는 고산리 유적은 지상 주거 유적입니다. 집터가 남아 있는 유적인거죠. 그리고 신석기 시대 유적이다 보니 돌화살촉, 돌창, 갈돌, 갈판, 찍개, 밀개 등의 다양한 석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꽤 많은 석기가 현무암으로 되어 있어 흔히 보던 석기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시관에서 풀과 점토를 섞어 만든 토기까지 살펴보면 제주의 신석기를 조금 엿보았다고는 할 수 있을 겁니다.
신석기 다음은 청동기입니다. 청동기 시대에 돌로 된 것이라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커다란 돌로 된 무덤, 고인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제주올레를 걷는 중에는 10-1 가파도 코스에서 고인돌을 만나볼 수 있고 조금 돌아간다면 9코스의 종점 화순해수욕장 근처와 18코스의 삼양해수욕장 근처에서 고인돌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강화도의 거대한 북방식 고인돌보다는 바둑판 모양과 닮은 남방식 고인돌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역시 현무암으로 되어 있습니다. 화강암이 아닌 현무암 고인돌이라니 새삼 신기했습니다.
이제 과거의 유물들을 지나 현재의 문화와 이어지는 돌의 쓰임새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제주가 한반도의 산하로 완전히 들어와 중앙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으며 기록을 남긴 것은 고려시대부터입니다. 이때부터 제주의 문화에 대한 기록들이 조금씩 남아있죠. 그중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제주의 유명한 돌문화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돌담입니다.
돌담은 제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제주올레에서도 마찬가지죠. 중산간의 밭에서도, 목장에서도, 주거 지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돌담이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제주의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서, 말과 소들이 주거 지역이나 밭을 침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밭이나 목장을 갈고 남은 돌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등 다양한 추측들이 있습니다. 이 많은 추측들은 제주의 환경을 극복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돌담이 나왔다는 것으로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현무암이 가득해 척박한 환경을 현무암을 이용한 돌담을 통해 극복하는 과정은 역설적이지만, 제주인들의 강인한 삶의 의지를 느끼게 합니다.
제주에서 돌은 실용적으로만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사용되곤 했죠. 돌을 통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보통은 기암괴석을 앞에 두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돌의 쓰임은 보다 가볍습니다. 제주의 상징으로 쓰이며 제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돌하르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돌하르방은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제주의 관광 상품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영조 30년(1754년)에 제주목사 김몽규가 제주읍성의 동·서·남문에 각각 8기씩,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의 동·서·남문에 각각 4기씩 도합 48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요. 이중 1기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사라졌고, 2기는 서울 경복궁 옆 국립민속박물관에 있어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총 45기입니다. 성문 앞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아 읍성 앞 지킴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장승처럼 돌조각에 상징성을 부여하여 고을에 다가오는 재액을 막아줄 것이라 믿은 것이죠.
제주올레를 걷는 와중에는 17코스의 종점 부근인 관덕정에서 4기와 제주목 관아 안쪽에서 2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9코스를 돌고 시간이 남아 대정현성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8기의 돌하르방을 더 볼 수 있었습니다. 관덕정이나 제주목 관아에서 보는 돌하르방이 엄숙한 느낌을 주며 늘씬하게 잘생긴 돌하르방이라면 대정현성에서 본 돌하르방은 해학적으로 동네 할아버지처럼 묘사하여 친숙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대정현성에서 본 돌하르방은 흔히 생각하던 돌하르방과는 달랐지만, 친숙한 느낌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더 정감이 갔습니다.
이 외에도 제주읍성 바깥 동쪽과 서쪽에 위치한 동자복상과 서자복상 중 서자복상을 17코스 중간 용화사 경내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복을 가져오는 석상으로 오래 전부터 제주민들에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12코스 종점 용수포구나 17코스 해안도로를 걷는 중간에 방사탑을 볼 수 있습니다. 방사탑은 액운을 막아주고 지세가 약한 곳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현무암, 즉 돌은 제주민들의 역사와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돌이 불모의 환경을 제공했지만, 그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주만의 문화 경관이 돌을 이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돌은 극복 대상인 고난임과 동시에 사람들이 살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이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는 종교적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주올레를 걸으며 무수히 만나게 될 현무암들을 그저 신기한 돌, 예쁜 돌로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쯤은 현무암이 있기에 만날 수 있게 된 제주의 풍경과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들에 대해 귀 기울여 봤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