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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해녀

by baekja

삼다도 제주.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죠. 돌과 바람은 제주가 살기 쉽지 않은 섬임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여자가 많다는 것은 그 불모의 섬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의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많다는 것이 어떻게 삶의 역경을 헤쳐 나온 의지의 상징이 되는 것일까요? 안타까운 사실이 숨어있습니다.


바다에서 해산물을 캐는 여자라면 모두 해녀라 부를 것 같지만, 그건 아닙니다. 나잡어업을 하는 여자, 그러니까 특별한 보조도구 없이 맨몸으로 들어가 해산물을 캐는 여자들만이 해녀라 불립니다. 이런 해녀 문화는 제주도와 일본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사실 해녀라고 부르니까 원래도 여자들만 했을 것 같지만, 원래는 여자와 남자가 같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고려사>를 보면 탐라군의 관리자로 부임한 윤응균이 ‘남녀 간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하고 말했고, 조선 인조 때도 제주목사가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조업하는 것을 금한다.’는 명이 내려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포작(鮑作)이라 해서 힘이 더 드는 전복을 캐고 여자는 잠녀라 해서 미역과 같은 해조류를 채취하는 일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이런 나잠어업을 여성이 전적으로 맡게 된 것은 1702년 이형상 목사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고 다만 잠녀에게만 맡긴다.”는 말이 적혀 있지요.


얼마 안 되는 기간 사이에 남자가 아닌 여자가 맡게 된 이유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인조 7년(1629년) 제주에 내려진 가혹한 세금을 피해 도망가는 자들이 늘어나 출륙금지령이 내려집니다. 여기서 제주에 내려진 세금이 매우 가혹했음을 알 수 있죠. 이런 세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남자들은 군역과 뱃일에 힘을 써야 했는데 전복을 세금으로 바쳐야하는 양도 늘어나니 자연히 남자들이 하던 포작업무도 여자들에게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제주의 사람들이 많이 먹기 위해서가 아닌 육지의 사람들에게 바쳐야 할 세금과 뇌물이 많아져서 나잠어업을 모두 여자가 해야 했던 것이 해녀 문화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해녀 문화는 여전히 제주도민의 무수한 삶의 방식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는 해녀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지요. 해녀 문화의 흔적은 제주올레길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해녀들이 일을 하러 가기 전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기는 해녀 탈의장이나 해녀들이 잡은 수산물로 직접 요리를 해서 파는 해녀의집, 해녀체험장, 해녀 학교 등 다양한 장소들을 지나가면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해녀 탈의장은 제주올레길 곳곳에 있습니다. 해안가 마을을 지나가다가 붉은색 방수천으로 덮인 구형 스티로폼이 달려있는 건물들을 발견하면 그곳이 해녀 탈의장입니다. 구형 스티로폼은 테왁으로 물 위에 띄워두고 작업 중간에 쉬는 쉼터 역할을 합니다. 그것만 가지고 해녀 탈의장인지 확신할 수 없다면 문 옆에 달려 있는 유네스코 세계인류유형유산 인증서가 달려있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간혹 건물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탈의장이 사용 중일 수도 있으니 눈길 주지 않고 ‘이곳이 해녀 탈의장이구나.’ 생각하고 지나가면 됩니다.


해녀 탈의장 근처에는 항상 작업장이 있습니다. 작업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냥 바다죠. 다만, 해녀의 작업장과 그냥 바다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해안가부터 시작한 콘크리트 길이 바다에 접한 곳까지 나있는 곳이 있습니다. 해녀길이라 부르는 이 길은 현무암이 가득한 불규칙한 암석해안에서 다치지 않고 편히 작업장까지 나가도록 만든 길입니다. 다른 곳에는 아예 이곳이 어느 어촌계의 어장이라며 표지판을 설치해둔 곳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다 같은 바다이고 작업장이지만, 각기 다른 용도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붙여 놓습니다. 70세 이상 고령인 해녀들을 위한 전용어장인 할망바당, 초보 해녀들이 물질을 배우는 구역인 애기바당, 마을에 학교를 짓기 위한 기금이나 장학금을 모으는 학교바당, 마을을 위해 수고하는 이장에게 경제적 보상을 해주기 위한 이장바당 등이 있지요. 할망바당에서는 물질을 잘 할 수 없는 해녀들을 위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준 해녀 공동체의 배려가 돋보이고, 애기바당에서는 초보자부터 차근차근 교육시키는 해녀의 직업적 전문성이 드러납니다. 학교바당이나 이장바당에서는 해녀 공동체가 마을에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죠.


이런저런 작업장에 대해 얘기했지만, 결국 바다에서 해산물을 캐는 곳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죠. 이렇게 캔 해산물을 바로 팔기도 하지만, 해녀의 집에서 자신들만의 요리법으로 요리를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올레길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한 번 가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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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야 해녀를 교육하는 곳이 따로 없어 각지의 애기바당 같은 곳에서 사람을 교육했지만, 요즘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이를 체계적으로 전승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어 해녀학교에서 교육합니다. 올레길에는 7코스의 법환좀녀마을해녀학교와 15-B코스 제주한수풀해녀학교가 있죠. 사실 해녀학교를 들어가지도 못하고 스쳐지나가기만 했기 때문에 어떤 시설을 갖추고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한수풀해녀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교육과정과 같은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홈페이지를 방문해보기를 권합니다.


20210124_105848.jpg 제주한수풀해녀학교


현재 해녀의 삶을 담은 공간들을 소개했으니 과거 해녀의 삶을 담은 공간을 소개할 차례입니다. 바로 불턱입니다. 불턱도 제주올레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외딴 섬처럼 서있었던 19코스의 고남불턱이나 시멘트를 바르고 슬레이트 지붕을 씌웠던 흔적이 남아있는 21코스의 신동코지불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불턱은 바닷가 근처의 돌을 네모나게 쌓아올려 바람을 막고 가운데에는 불을 피게 하여 몸을 말릴 수 있도록 한 곳입니다. 해녀 공동체의 모임장소였으며 회의장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해녀 공동체의 방향을 정하고 문제를 해결했죠. 1980년대 이후로는 해녀 탈의장이 이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불턱에 앉는 자리를 통해서 해녀들의 선후배 관계를 나타내는 상군, 중군, 하군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연기를 맞지 않고 가장 따뜻한 자리에 앉는 것이 상군이고 가장 안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이 하군이었죠. 불턱은 더 이상 쓰지 않지만, 이 관계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상군은 경력 있는 베테랑이고 하군은 경력 없는 신입이기에 상군 해녀들이 하군 해녀들에게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수해줍니다. 상군, 중군, 하군 해녀들을 이끄는 대장은 대상군이라 하는데 대상군은 어획량이 가장 많은 해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를 이끌 능력이 되고 모두를 잘 아우르는 리더의 능력과 날씨를 잘 파악하는 등의 종합적인 해녀로서의 능력이 대상군으로 뽑히는 기준이 됩니다.


20210107_105605.jpg 신동코지불턱


8코스의 끝 대평포구에 가면 해녀에 관련한 조금 특이한 곳이 있습니다. 난드르올레좀녀해상공연장이죠. 대평포구와 너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공연장의 풍경이 무척 예뻤습니다. 이곳에서 공연하시는 분들은 서귀포시 대평 어촌계 해녀 공연단으로 해녀 분들이 직접 와서 공연을 하신다고 합니다. 이곳에 이런 공연장이 만들어진 이유는 대평리에서 태어난 이영근씨가 <출가해녀의 노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곡은 잊혀 있었는데 제주해녀박물관 좌혜경 관장이 대평리 박복자 씨 기억에서 찾아내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알아낸 곡에 사라예술단 강경자 단장이 다시 곡을 붙여 2009년부터 이곳 공연장에서 대평 어촌계 해녀 공연단이 다시 부르게 된 것입니다.


20210115_130228.jpg 난드르올레좀녀해상공연장


점점 해녀의 수는 줄고 있습니다. 2008년 5,244명이었던 제주 해녀의 수는 2019년 3,820명까지 줄었죠. 그러면서 무형유산인 해녀 문화에 속하는 풍습, 노래, 춤 등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라지는 해녀 문화를 보존하고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 있습니다. 20코스 끝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입니다. 올레길을 걷거나 제주 여행을 하면서 해녀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꼭 방문하기를 권하는 곳입니다. 불모의 섬 제주를 개척한 과거와 현재 해녀들의 삶과 그들이 사용했던 도구들의 변천, 그리고 곳곳에 살아있는 해녀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영상들까지 제주 해녀의 모든 곳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시해놓았습니다. 실내 전시장을 나오면 야외 전시장에서 제주의 민속 관련 문화재들과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을 볼 수 있습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2년 수탈을 거듭하는 일본인들에게 해녀들이 모여 항거한 사건이죠. 이 내용은 이후 제주역사를 설명할 때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고 해녀박물관 이야기는 이만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20210131_141659.jpg 제주해녀박물관


올레길에서 볼 수 있는 해녀와 관련된 장소들에 말해보았습니다. 참 많죠? 올레길을 걷다 이런 장소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때는 그냥 장소들을 볼 때가 아니라 그 장소를 현재 해녀들이 사용하고 있을 때에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4코스 눈 덮인 해안가를 헤치고 작업장에 가서 테왁을 끼고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과 12코스 중간 자구내포구에서 물질을 마치고 수고했다고 제주도 사투리로 정겹게 말하며 오토바이를 타고 각자 헤어지는 해녀들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불모의 땅 제주를 지탱해 온 삶이 온전히 느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눈으로만 보던 해녀 문화가 제주의 삶 중 하나로 온몸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해녀들의 삶과 관련된 장소들을 그냥 보면 “와, 신기하다.”라고 말하고 지나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을 인간의 맨몸으로 거친 자연환경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은 인간 의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면 거룩하고 숭고한 느낌마저 들지요. 그리고 그 삶을 유지해야만 했던 아픈 역사를 마주하면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여자로 날 바엔 쉐로 나주.’ 여자로 태어날 바엔 소로 태어나겠다는 제주 속담입니다. 이 속담에 그들의 거룩하고 숭고한 삶과 그 고난의 길에 대한 고통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주도 여행을 하다 해녀와 관련된 곳을 가게 된다면 이 속담을 떠올리며 신기한 제주의 문화로서의 해녀를 넘어 자연의 저항과 다른 인간의 수탈을 견뎌온 그 무엇보다 강인한 삶 자체로서의 해녀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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