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제주가 한국이라는 경계에 완전히 포섭되지 못한 변두리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주는 정신적으로나 내적으로 포함되지 않았을 뿐 조선 후기에는 이미 호남(湖南)지방 그러니까 전라도라는 행정구역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관덕정의 ‘湖南第一亭(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이걸 증명하죠. 그리고 아무리 육지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의식은 오랜 기간을 거쳐 제주민들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제강점기가 찾아왔을 때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사가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겠죠. 올레길에서도 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코스의 마지막 하모체육공원 앞 사거리에는 몇 가지 비석이 서있습니다. 모슬진성 터임을 나타내는 비석 옆에는 오좌수의거五座首義擧비가 서있죠. 1887년 8월 가파도에서 전복을 캐던 일본 어선 6척이 모슬포에 내려서 닭과 돼지를 약탈하자 이만송 등 5명이 이에 저항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만송이 살해당한 사건을 적어 놓은 비입니다. 이만송과 더불어 저항한 5명에게 좌수라는 벼슬이 내려져 오좌수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주민들의 물품들을 약탈하고 제주바다에서 마음대로 조업하며 부녀자를 겁탈하고 저항하는 자를 살해한 일들은 19세기 후반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제주민들은 이에 일본인들의 수산물 가공 공장을 파괴하고 조업을 방해하는 등 저항했지만, 힘없는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이 제주도로 들어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력한 정부를 대신하여 1909년 제주에서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막을 수 없어 제주민들의 원한이 계속 쌓인 상태로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18년 일제강점기 이후 최초의 항일 운동이 벌어지는데 법정사 항일 운동입니다. 법정사의 주지인 김연일이 중심이 되어 6개월여 정도 준비한 항일 운동으로 선봉대는 34명이었으나 이후 동조하여 참여한 주민이 700여 명이었습니다. 단일 규모로는 제주 최대의 독립운동이었죠. 무장한 시위대는 화승총을 들고 중문리 주재소를 공격했으나 이후 일본 순사대의 반격으로 항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한 번의 시도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주민들에게 항일 의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운동이었죠.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일부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문구죠. 헌법의 문구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헌법에 적힐 정도로 3.1운동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은 대부분의 동의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큰 저항 운동이라 할 수 있는 3.1운동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특히 어느 정도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시장이 있는 고장이라면 소규모라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는 제주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8코스의 종점이자 19코스의 시작점인 조천만세동산은 조천 3.1운동이 일어난 곳입니다. 예전에는 미밋동산이라고 불렸다하죠. 지금은 여기에 3.1독립운동기념비가 서있습니다. 만세동산주변도 현재 제주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추모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커다란 추모탑과 뒤의 사당, 그리고 옆에 있는 항일기념관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제주의 항일 운동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0년도 더 전에 힘차게 만세소리가 들렸을 조천 3.1운동은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시작됩니다. 3.1운동의 상황을 숙부인 김시범이 김장환에게 듣고는 제주에서도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3월 21일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만세 시위행진은 3월 24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서귀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이 그랬듯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제에 영향을 주어 문화통치를 하게 만들었죠. 그래서 1920년대에는 제주도에서 다양한 민족교육을 하기 위한 다양한 학교들이 세워집니다.
10-1코스 보리밭으로 가득한 평평한 섬, 가파도의 중심에는 가파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 교문 옆에는 자그마한 공원과 함께 동상과 비석이 세워져있습니다. 비석에는 태극 문양과 함께 ‘殉國將兵忠魂碑(순국장병충혼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공원의 이름은 회을 공원이고 동상은 회을(悔乙) 김성숙(金成淑) 선생의 동상입니다. 제주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김성숙 선생은 문맹퇴치를 통한 독립운동을 실시하기 위해 신유의숙(辛酉義塾)을 가파도의 청년회와 함께 1922년 설립합니다.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로 설립되었으며 교표를 무궁화로 지정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하여 1년 동안 폐쇄조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교육의지는 꺾을 수 없어 계속 유지되고 현재는 가파초등학교로 변하여 그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신유의숙과 같은 예는 광선의숙, 한남의숙 등이 더 있으며 야학을 주도하는 독서회나 청년회 등의 활동들도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민족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이 제주 곳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자잘한 독립운동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1932년 큰 항일운동이 제주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해녀항일운동이죠. 1920년 만들어진 관제 해녀어업조합은 일제에 수탈당하는 해녀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변질되어 오히려 일제와 결탁하여 해산물을 매우 낮은 가격에 매입합니다. 이에 분노한 해녀들이 1931년 여름부터 준비하여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시작했고, 1월 12일에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된 시위에 놀란 제주도사가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며 한 발 물러섰지만, 시위가 끝난 후에 사건의 조사와 함께 청년 운동가들을 대규모로 검거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해녀들은 다시 시위를 했으나 강력한 탄압에 1월 27일 종달리 해녀들의 시위를 마지막으로 항일운동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연인원만 17,130명이고 시위와 집회 횟수만 238회에 달해 1930년대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코스의 종점 해녀박물관 옆에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비가 세워진 연두망 동산이 있습니다. 연두망 동산은 해녀항일운동 최대의 시위였던 1월 12일 시위당시 집결 장소였으며 이곳에만 1000여 명의 해녀가 모여 세화리 오일장으로 시위하며 행진했다고 합니다. 이 동산에는 기념비와 함께 자신들의 의지를 제주도사에게 관철한 해녀들의 대표인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의 흉상이 있으며 당시 해녀항일운동의 지도자였던 강관순이 지은 해녀노래가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해녀항일운동의 흔적은 1-1코스의 우도 천진항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가 항구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죠. 우도는 해녀항일운동에 참가한 해녀들이 검거를 피하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제주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나 신좌 소비조합운동 등이 있었으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정책에 큰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광복 직전에는 그저 제주도가 일본의 요새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며 힘든 공사장에 끌려가 일해야 했죠. 그렇다고 제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일제에 의한 삶의 터전이 침해받는 동안 제주민들이 보여준 저항정신은 무척이나 빛났습니다. 또한, 일제라는 공공의 적에 의해 한반도 전체가 고통 받는 동안 3.1운동을 통해 같이 저항하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해녀항일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저항하기 힘들었던 1930년대에도 거대한 항일 시위를 일제에 보여주면서 일제의 강제통치에 대한 거부감을 분명히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