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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지금까지 이어지는 비극, 4·3사건

by baekja

제 전공은 사학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봤으니 중학교 때부터 사학과를 오고 싶어 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한국사를 달고 살아온 저도 제주 4·3사건은 그저 이념 갈등에 의해 제주 사람들이 많이 희생된 평범한 역사의 한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전역하기 직전 처음으로 4.3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하면서 이것이 매우 복잡한 사건이며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한국현대사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올레 완주를 하기 전인 2020년 4월, 제주올레 18코스를 돌면서 본 곤을동 마을에 의해 이것이 그저 감정 없이 이성으로만 대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18코스 곤을동 마을은 이제 사라져버린 마을입니다. 4·3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없어지고 폐허가 된 마을을 ‘잃어버린 마을’이라 칭하는데 곤을동 마을은 이 잃어버린 마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멀리 보이는 다 무너져가는 담벼락과 집터만 보이는 마을은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멀리 제주항에서 나오는 커다란 배와 맑은 하늘 푸른 바다 아래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은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대비되어 그 비극적인 모습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시간이 다 지나고 외부인이 보는 데도 마음이 착잡해지는데 당장 그 사건을 겪으며 살아왔을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는 최소 3만 명 최대 8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주인구가 약 30만 명으로 생각되니 제주도 인구의 10% 이상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 제주 4·3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제주도에 4·3관련 유적지만 596곳이라 하니 4·3 사건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잘 예측이 되지 않습니다.

20210128_094938.jpg 곤을동 마을


이 참혹하고 거대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해방 이후 제주의 상황을 봐야 합니다. 해방 이후 제주도에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세워진 이후 제주도 인민위원회까지 만들어집니다. 이 위원회들의 지도자는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대부분의 세력이 좌익이었던 만큼 좌익 사람들이 다수 있었지만, 우익 사람들도 섞여있었고, 극단적인 친일을 하지 않았다면 친일파들도 이 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법지대가 되어버린 제주도의 치안을 담당하며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1947년 초까지 제주도 내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 내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본 미군정도 처음에는 이들과 협력하며 잘 지내는 듯했으나 한반도 내에 정부는 미군정 하나밖에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합니다. 1946년 제주도를 도(道)로 승격한 것이 일례죠. 제주도의 행정구역 단계를 올려 더 많은 경찰을 파견하고 9연대를 제주에 자리하게 합니다. 물론 경찰을 증원하는 데 악질적인 친일파를 등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행정구역이 상승하는 데 이것보다 큰 문제는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주는 큰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고 일본에서 일하던 제주민들 6만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생필품마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걸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밀수가 많이 일어난다며 제주에 들어오는 품목에 대해 통·관세를 매기고 재일교포들이 보내주는 생필품들은 밀수품이라며 제주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연히 미군정에 대한 불만은 늘어났습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는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제주 4·3 사건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즉 1947년 3월 1일에 일어난 시위부터 4·3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 1947년 3월 1일의 시위는 미군정과 친일파 경찰들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었습니다. 제주 전역에서 3·1운동 28주년을 맞아 시위가 일어났죠. 이미 열기가 가득했던 시위는 기마경찰대가 아이를 치고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으면서 폭발하기 직전의 분위기로 변합니다. 경찰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죠. 이에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쏩니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사망했고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3·10 총파업을 벌입니다. 이렇게 미군정에 반항하는 제주도를 미군정과 경무부장은 빨간 섬으로 규정하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의 우익 단체를 제주도로 내려 보냅니다. 이들은 죄없는 양민들에게도 폭력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무차별로 2천명 이상을 체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문치사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제주도의 분위기는 날로 험악해져갔습니다.


제주도민들의 저항의 근본적인 이유는 미군정과 친일파 경찰들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이런 저항을 주도한 것은 남로당 제주도당이었습니다. 그들은 섬의 고조되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무장항쟁을 준비한 후 4월 3일 도내 24개 지서 중 11개 지서와 우익단체 간부들의 집을 습격하며 비극의 서막을 올립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아직 소수였기에 일을 더 크게 벌이지 않기 위해 제9연대장인 김익렬이 무장대 지도자인 김달삼과 회담을 벌여 성공적으로 끝냅니다. 하지만, 이런 지도부들의 화해로는 소용없었는지 4월 30일 무장대에서 우익 청년단의 부인 2명을 납치했고 한 명은 총으로 살해됩니다. 이에 분노한 우익 청년단원들은 5월 1일 오라리에 방화를 합니다. 이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제9연대는 우익 청년단원들이 했다고 보고 했지만, 미군정은 경찰의 보고대로 폭도들의 소행으로 보고 강경진압을 시작합니다. 여기에 5·10총선거를 통일정부를 원하는 제주만 반대하면서 제주는 공산주의자들의 소굴로 완전히 규정됩니다.


5월 12일부터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어 어마무시한 수의 양민들이 잡히기 시작했으며, 10월 8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10월 20일 이후 전도 해안선에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알리는 포고문이 10월 11일에 발표됩니다. 이때부터 주한미군사령부에서 ‘민간인 대량살육작전’이란 일컫는 소개-방화-처형을 자행합니다. 이미 항복 권유로 무장대는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학살은 계속됩니다. 1949년 이후에는 이러한 일들이 줄어들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예비검속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4·3관련 수형자들을 집단 학살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4·3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억울하게 4·3사건으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자식들까지 연좌제로 고통 받아야 했던 사람들과 빨갱이로 몰려 죽은 일반 양민들의 유족들은 진상 규명 한 번 제대로 외치지 못하고 최근까지 고통 받아 왔습니다.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 사건은 1코스에서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산읍 일대의 주민들이 끌려와 죽은 터진목은 올레길에서 이 가슴 아픈 사건을 맨 처음 확인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원래는 도로 확장공사에 의해 양민학살지였는지 알지도 못했던 곳을 이후에 확인하여 추모공원으로 조성해두었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가 쓴 제주 4·3 기행문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과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은 무척 슬퍼집니다.


KakaoTalk_20211115_193646595_05.jpg 터진목에서 바라 본 성산일출봉


1948년 12월 14일 4코스에 있는 토산리 주민들은 군인들에 의해 마을공회당에 모였습니다. 이후 18세에서 40세까지의 남자들과 몇 명의 마을 처녀들을 끌고 갔고 모두 표선리 수용소로 끌고 간 후 며칠 후 여자 한 명을 제외하고 표선 백사장에서 전부 총살했습니다. 이들이 죽은 백사장은 현재 제주민속촌 뒤에 있는 표선 한모살이라는 곳입니다.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 죽어야만 했던 그들의 짧은 생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지금 토산2리 마을회관 앞 비석만이 그들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0210110_123011.jpg 토산 2리 마을회관


6코스의 정방폭포는 시원하게 물을 쏟아내며 장대한 모습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정방폭포의 물이 한 때는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사실을 아시나요? 지금 송산동사무소 자리에 있었던 농회창고는 취조실 및 유치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서귀리 및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면, 안덕면, 대정면, 표선면 주민까지 많은 지역의 주민들이 여기로 끌려와 고문당했습니다. 고문 취조 후 즉결처형 대상자로 지정되면 정방폭포로 끌려와 살해당했죠. 아름다운 폭포가 일순간 학살지로 변한 것입니다. 물은 그때도 지금도 떨어지고 있지만, 장소의 의미는 그때와 지금이 너무도 달라 알 수 없는 씁쓸한 마음이 폭포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210112_122422.jpg 정방폭포


10코스 섯알오름 양민학살지는 무척 유명한 4·3유적지입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유적지들의 학살이 대부분 1948년이나 1949년에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1950년에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무고한 양민 344명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해 예비검속으로 체포해둔 뒤 한국전쟁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252명을 계엄 사령부로 송치해두었습니다. 1950년 7월 16일 이들 중 20명을 섯알오름에서 학살하고 41명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동년 8월 20일에는 한림수협창고와 무릉지서, 모슬포 절간창고에 나누어 구금되어있던 나머지 인원들을 섯알오름에서 학살한 후 암매장하였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끌려가면서 옷가지나 신발을 던지며 자신들의 족적을 남긴 희생자들에 의해 알려졌으며 이를 알고 온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했으나 경찰들이 제지하였고 1956년이 되어서야 유골을 수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149구의 유해 중 17구는 신원을 확인하였으나 나머지는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근처의 한 곳에 묻고 백조일손지지라 명명했습니다. 행방불명된 41구의 유골은 지금은 제주공항이 된 정뜨르비행장 학살지에서 2007년 발견되었습니다.


제가 섯알오름에 도착했을 때는 날씨가 갑자기 흐려졌고 비도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섯알오름 양민학살지에 돌고 있는 고요하고 삭막한 분위기가 제 마음에 우울함을 더했습니다. 학살지를 한 바퀴 돌고 가만히 서서 비석에 적힌 내용을 읽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만이 제 마음을 뒤덮었습니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인 당시의 경찰이 밉고 군인이 밉고 정부가 미워지더군요. 학살당한 이들의 유족들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자신의 가족들을 잃은 걸로 모자라 몇 십 년을 빨갱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습니다. 2015년이 되어서야 그들은 명예를 되찾고 배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복잡한 감정을 담아 학살지 앞에서 추모의 절을 하고 조용히 그 어두운 장소를 빠져 나왔습니다.


20210117_125440.jpg 섯알오름 양민학살지


14-1코스 저지곶자왈 중간에는 볏바른궤가 있습니다. 궤는 작은 규모의 바위굴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죠. 이런 바위굴들은 생태적 가치도 높지만 역사적 가치도 높습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죠. 여기서 발견된 유물 중 이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탄피입니다. 이 탄피는 토벌대나 무장대의 것 혹은 그들을 피해 머무른 주민들을 향해 쏜 것이겠죠.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도 사람을 향해 울려 퍼졌을 총소리를 생각하니 참담한 기분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죽은 예전 사람들을 생각하니 무척 소름이 돋아 그 자리에서 빠르게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20210122_110501.jpg 볏바른궤


선인장 가득한 월령리에는 14코스에서 유명한 4·3유적지가 하나 있습니다. 이 유적 자체가 과거의 4·3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4·3사건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살았던 곳입니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사람이 살고 있는 민가 같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진아영할머니 삶터입니다. 이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그 집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온기로 가득합니다. 할머니는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이후 할머니는 무명천 할머니라는 별칭처럼 무명천으로 턱을 가린 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할머니는 이런 고통스러운 삶 끝에 2004년 9월 8일 돌아가셨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이유 모를 재난 때문에 평생을 고통 받으셨을 할머니의 삶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하고 마당에 나와 있는 잡초를 뽑으며 삶이 끝나고 하늘에 가서는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20210123_112453.jpg 진아영할머니 삶터


19코스는 함덕해수욕장에서 북촌리에 이르기까지 참혹한 역사가 가득합니다. 함덕리의 주민들은 백사장에 끌려나와 총살을 당했고 함덕해수욕장과 북촌리 사이의 서우봉에서는 정상에서 바닷가로 향한 절벽인 몬주기알 위에서 많은 주민들이 총살당했습니다. 아픈 역사를 삼키며 서우봉을 내려오면 이제 무수한 비극이 가득한 4.3사건에서도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일어난 조천읍 북촌리 마을에 도착합니다.


지금은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한 북촌리에서 1949년 1월 17일 살해당한 주민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00명 이상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학살은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이 2명 사망하자 분풀이로 행해진 것입니다. 분풀이로 사람을 몇 백 명 이상 죽이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후에도 마을을 전부 불태우고 함덕리로 소개령을 내렸는데 100여 명만 함덕리로 가고 나머지는 산으로 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함덕리로 간 주민들은 모두 백사장에서 학살당했습니다.


20210129_103536.jpg 서우봉을 내려오면서 보이는 북촌리 마을의 모습


북촌리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곳들 중 하나인 너븐숭이에는 4·3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북촌리에서 일어난 4·3관련 사건들에 대해 잘 정리해둔 곳이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념관 내에 마련된 추모 공간이었습니다. 4·3 사건 당시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는 북촌리 주민들의 이름과 성별, 나이 사망한 날짜와 장소를 모두 적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을 천천히 살펴보다보면 가끔 턱하고 숨이 막히며 갑자기 울음이 차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OOO자’라고 쓰인 것을 볼 때입니다. 나이가 2세, 3세로 적힌 아이들의 사망을 기록해둔 것이죠. 도대체 그 나이의 아이들이 무엇을 안다고 총으로 쏜 것일까요? 학살의 참혹함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0210129_105027.jpg 너븐숭이 4.3기념관 내 추모 공간


기념관 밖으로 나오면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기들의 무덤인 ‘애기무덤’과 현기영 작가의 <순이삼촌> 문학비를 볼 수 있습니다. <순이삼촌>은 1978년 발간되어 제주의 비극을 알지 못했던 육지 지식인들에게 4·3사건을 최초로 널리 알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발간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되었고 현기영 작가는 바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순이 삼촌>은 빠르게 금서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매우 커서 흔히 폭동으로만 알고 있던 제주 4·3사건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었습니다. 4·3사건 관련 문학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인 <순이삼촌>의 문학비도 4·3사건의 비극적 느낌을 가득 담아냈습니다. 소설의 문구가 적힌 비석들이 스러져 널브러져 있죠. 문학비 사이를 거닐면 학살의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20210129_112052.jpg 애기무덤


북촌리는 주변이 제주 4·3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마을 곳곳이 4·3사건과 관련이 있지요. 북촌리 앞 무인도인 다려도는 토벌대를 피해 주민들이 숨었던 곳이기도 하고 북촌 도댓불(등대)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북촌포구는 무장대에 경찰 2명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죠. 지금의 북촌리는 포구를 낀 평화로운 마을이지만, 마을 깊숙이 잠들어 있는 폭력적인 역사는 북촌리를 보고 있을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비애를 불러일으킵니다.


20210129_113730.jpg 북촌리에서 보이는 다려도


4·3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이어지는 사건이죠.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군경 유족과 군경과 무장대에 의해 희생되고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 양민 유족, 미군정의 횡포와 경찰들의 탄압이 역사적 배경에 있음이 밝혀지며 역사적 평가가 복잡해진 무장대의 유족들의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가 전부 풀린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살기 위해서 경찰이나 군인, 우익 청년단과 젊은 딸들을 결혼시켰기에 다른 마을의 가해자가 지금 자신의 사위이거나 남편인 경우도 허다합니다. 극단적인 이념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대량 학살사건이 섬 전체를 뒤덮었기에 사람들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매우 엇갈리고 있죠.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희생자들 중 죽은 자는 추모하고 산 자는 위로하는 것이 일단 마음에 깊게 박힌 상처들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글은 무척 길었지만, 아직 다 말하지 못한 4·3사건의 숨은 이야기들도, 4·3사건의 다른 유적지들도 많습니다. 혹시 올레길을 걷거나, 혹은 제주도 여행을 하다가 4·3사건의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면 시간을 내어 조용히 추모정도는 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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