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살을 피해 창덕궁의 건물 속 그늘을 찾아 이리저리 거닐고 있었을 때였다. 대조전 뒤의 돌계단에서 뭔가 이질적인 것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예전 조선에서는 낼 수 없었을 색인 짙은 남색의 무언가는 SAMSUNG의 로고가 박힌 이어폰이었다. 이어캡이 한 쪽이 빠진 채로 버려진 그 현대의 물건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의 돌계단 위에 그렇게 놓여있었다. 문화유산에 웬 쓰레기지 하면서 버리려다가 갑자기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살피다가 그대로 내 휴대폰에 꽂아 노래를 들었다. 음질이 엄청 좋다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잡음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건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누군가가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잊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한번 알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해 내지 못하다.’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의미는 이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어폰이라는 것은 한번 알았던 것이지만, 이걸 기억해내지 못했기에 그곳에 쓸쓸히 남아 잊힌 것이다. ‘잃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가졌던 물건이 자신도 모르게 없어져 그것을 갖지 아니하게 되다.’이다. 그렇다면 이어폰을 가졌다가 자신도 모르게 없어져 그것이 내 품을 떠난 것도 맞기에 ‘잃다’도 틀린 말이 되지 않는다.
두 말이 다 성립할 수 있다면 약간 다른 측면에서 봐야겠다. 잊어서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잃어버려서 잊은 것일까? 우린 가끔 모나미 볼펜 같은 것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아니, 그냥 가끔은 그 존재 자체를 잊어버려 그 각자의 가치가 있는 작은 것들을 결국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은 잃어버려 그것을 잊게 되는 경우도 있다. 100원이나 1000원짜리 같은 조그만 액수의 돈을 잃어버리는 순간엔 인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곧 이내 그것들의 존재를 자각하지도 못하는 잊는 상태가 된다.
그럼 이 너무나 비슷한 두 단어는 왜 구별해서 존재하는 걸까? 사전적 의미의 다름이 아닌 둘을 구별하는 무언가 중요한 이유는 없을까? 사람이란 존재는 신이 아닌 엄청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부주의하게도 자신이 소유하려고 노력했던 수많은 물건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잃어버린 게 나도 너무 많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3권,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사주신 만년필 등. 그리고 사람은 또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를 아무렇게나 해대지만,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자꾸 잊는다. 잊고 또 잊는다. 그리고 잊었기에 내가 뭘 잊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만약 존재는 변하지 않고 있더라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태가 된다. 잃어버려진 무언가는 슬플 것이다. 그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안타깝게도 자신이 인식은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기에 슬프다. 잊힌 무언가도 슬프다. 그 자신의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 상태가 되며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잊힌 존재가 인식하게 되면 그 절망감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잊는다는 것 그리고 잊힌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뺏겨 마녀의 하수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하쿠의 모습은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의 진짜 이름은 잊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찾지 못해 괴로워하는 하쿠의 모습은 처절하기 짝이 없다. 그 반대로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유명한 구절은 우리가 잊히지 않고 인식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고 소중한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술 작품에서 이렇게 잊음의 슬픔과 기억함의 중요함에 대해 역설해도 현실에서는 ‘잊음’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물의 대표적인 예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쓸쓸하게 이어캡 하나가 빠진 채로 발견된 이어폰이 아닐까 한다. 그건 잃어버린 물품이지만, 사람이 잊은 물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와 닿는다. 안타깝게도 그 이어폰은 좋은 이어폰도 아니고 이어캡이 빠진 약간은 쓸모를 잃은 상태였기에 그 원주인은 매정하게도 더 빠르게 잊어버릴 것이다. 나는 이런 잊음의 연속됨을 한 번이라도 막고자 결국 그 이어폰을 집으로 가져오고야 말았다. 나에게 잊힌 모든 것들에 대한 자그마한 애도와 사과의 의미로.
*2019년 여름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