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신 포도

by baekja

이솝우화 중 <여우와 신 포도>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높은 가지에 매달린 포도를 먹고 싶은 여우가 등장합니다. 열심히 뛰어봤지만 포도를 딸 수 없는 여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포도는 분명 신 포도일 거야.” 포도를 딸 수 없다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여우는 결국 포도라는 결과물이 오히려 안 좋은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합니다.


얼마 전 친구들과 도봉산을 다녀왔습니다. 평소에 운동을 별로 안 하다보니 무척 힘들게 거의 네 발로 걸어올라가다시피 하여 산을 올라갔습니다. 정상을 바로 앞에 두고 저는 친구들을 보내고 저는 돌에 기대어 그냥 쉬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정상을 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 목표는 그저 운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고소 공포증으로 인해 다리를 후들거리며 정상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은 정상의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며 제가 같이 정상에 갔으면 좋았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올라가서 봤을 풍경은 그리 아름답지 않을 거라 생각해 가지 않았을 뿐이야.”

친구들과 아침 산행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와 길을 가는데 정말 간만에 “도를 아십니까?”를 외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흥미를 가지고 1, 2시간 이야기를 들어준 후 내 갈 길 가는데 도가 튼 저는 시간도 많은 김에 ‘새로운 이야기가 있나?’하고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늘 듣던 똑같은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늘 듣던 이야기의 반복되는 한 구절에서 그만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도 높고 자신이 원하는 바도 높은데 노력하는 만큼 잘 안 되시죠?”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음이 동했지만, 몇 초내로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몇 년 동안 똑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오면서 단 한 번도 흔들렸던 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지금 제가 정신적으로 많이 몰려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지금, 친구들을 만나도, 가족들과 밥을 먹어도 가장 많이 듣는 것은 취직 이야기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의 눈길이 나에게 쏟아지는 지금 너무나 부담스럽고 힘듭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부의 기대보다 힘든 것은 나에 대한 기대를 하나씩 포기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10대를 지나 현실을 잊고 살던 20대 초반을 지나고 나서 만난 현실은 너무나 냉혹해서 제가 하는 노력과 저의 재능으로는 그동안 꿈꿔왔던 많은 일들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무척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이던 꿈들을 하나씩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보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힘이 듭니다. 더 많은 노력을 하지 못하는 제가 싫고 더 괜찮은 재능을 갖지 못한 제가 밉습니다. 몇 번이고 현실에서 애매한 위치에 서있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며 좌절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우는 무척 포도가 시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무척 잘 보호했다고. 닿을 수 없는 ‘포도’라는 ‘꿈’을 빠르게 포기하고 자기 위로를 한 여우를 보는 우리는 씁쓸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여우 자신은 오히려 행복했을 겁니다. 저도 그러면 높은 가지 위에 달린 포도를 포기하고 시다며 포기해야 할까요? 도봉산에서 친구들에게 한 말은 사실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괴리에서 나오는 고민은 여전히 저를 괴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길에서 사이비 종교를 전도하는 이에게 조금이나마 혹해버린 저는 그 고민에 대해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죠. 제가 신 포도를 잘 포기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은 여우가 될지, 아니면 신 포도라고 생각하여 포기했지만 마음속의 찝찝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여우가 될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포도를 향해 계속 뛰고 있는 여우가 될지는 졸업이 얼마 안 남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고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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