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지역
어느 나른한 오후. 친구와 점심을 먹고 신촌역에 가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오늘은 어느 역을 가볼까?’ 고민하면서 탔다기보다는 ‘일단 타보고 생각하자.’란 마음을 가지고 2호선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내선순환(시계방향)을 탈지 외선순환(반시계방향)을 탈지 고민하다가 몸이 이끄는 대로 외선순환을 탔습니다. 집에 가는 길이라 익숙해서 고른듯한 이 방향의 지하철 안에서 저는 그냥 창밖을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의욕도 없고, 밥은 먹은 뒤라 식곤증은 몰려오고. 그냥 다 포기하고 집에 가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지하철 노선도를 보았습니다. 고민하다 그냥 사당에서 내려 4호선으로 환승한 뒤 삼각지에서 내렸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목적지조차 정하지 못해 떠다니다 간신히 내린 역이었습니다.
실존주의 이후 사람의 존재 의미는 따로 있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뿐이며 그저 살아가게 된 것이라는 의식이 꽤 많이 생겼지만, 약 40분 동안 어떠한 감정과 이성 없이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벗어나 부유하는 느낌만 받는 순간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부유하는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던 지하철 열차 안에서 간신히 내려 발을 디딘 역은 삼각지였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한 역이라 내렸지만, 삼각지는 제게 큰 의미가 있는 역은 아닙니다. 그냥 익숙한 역일 뿐이지요. 삼각지역에 무엇을 보러 와서 개찰구 밖으로 나간 기억은 딱 한 번. 초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전쟁기념관에 데려다주셨을 때뿐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대단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곳은 아니기에 발걸음이 잘 닿지는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내용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곳보다는 추모관이나 그분들의 묘소들을 방문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더욱 방문할 의미가 없어져 대학 때는 산책 삼아 걸어서 한 번 온 것 빼고는 방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흥미가 많이 안 생기기도 했고요.
목적지로 삼은 적이 많이 없음에도 삼각지역이 익숙한 이유는 환승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출발지와 도착지의 역할을 하는 역이 아닌 그저 발길만이 스쳐 지나가는 경유지로서의 역. 기억에 남지 않을 법도 하지만, 무척 많이 지나쳐서 기억에 남아버린 역. 이곳을 많이 지나치게 된 것은 삼각지를 경유하는 것이 학교에서 4호선을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4호선 곳곳의 미술관을 가거나 집 가는 시간이 늦어져 1호선 막차가 끊겨 신논현역으로 가야 할 때 9호선으로 환승하는 동작역을 갈 때마다 삼각지를 지났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쌓이다 보니 개찰구 밖의 삼각지역은 생경한 데 반해 개찰구 안의 삼각지역은 익숙하다 못해 편안했습니다. 4호선과 6호선을 잇는 무빙워크가 있는 환승통로가 삼각지역의 랜드마크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떠다니다 멈춘 곳이 20대 이후로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삼각지역이라니 참 역설적입니다. 오후 3시경 삼각지역에 사람이 많을 만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조용한 역사에 가만히 앉아 역을 둘러보는데 뭔가 새로웠습니다. 환승만 하던 역에서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척 새로웠습니다. 과거의 제 추억을 보는 것이 아닌 현재 자신과 역이 함께하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떠다니는 우울함이 가라앉고 역의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타고 넘어 신선한 즐거움이 떠오를 때쯤 삼각지역이 가진 이면을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삼각지역은 멈추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는 곳이었습니다. 짧은 시간만을 머무르고 길의 끝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습니다. 어떠한 설렘과 기대도 없는 역.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삼각지역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 지나가는 것마저도 제 발걸음이 계속 쌓이면서 의미가 생겼습니다. 평범한 역의 공간에서 익숙함과 편안함을 주는 장소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저 또한,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오늘 갑자기 이 역에 멈추어 서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저 지나다니는 ‘공간’인 역의 이면에는 저의 발걸음과 경험들이 쌓인 익숙함이 있었습니다. 떠다니다가도 가라앉아 고정된다는 기분을 주는 그런 ‘장소’의 의미가 있는 삼각지역이 제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아마 내일도 모레에도 몇 년이 지나도 저는 삼각지역에 잘 멈추어 서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그날의 여행이 삼각지역에 멈추어 선 마지막이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몇 번이고 더 삼각지역에서 환승할 것이고 제 발걸음은 늘 승강장과 환승통로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삼각지역은 늘 그 자리에서 제 삶의 한 부분에 있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