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5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방문했습니다. 긴 환승통로를 따라 2호선 승강장으로 갔습니다. 외선순환행 승강장으로 들어서니 바로 옆에 4호선 환승통로가 있었습니다. 수유역에 살 때 그 환승통로를 따라 등교했던 것을 기억하며 한 번 웃어주고는 앉을 곳을 찾았습니다. 4호선과 5호선의 환승통로가 가까운 쪽에는 앉을 곳이 없어 천천히 승강장을 걸어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승강장의 반대 끝 쯤 도착하자 ‘Stress Free Design’이라고 적힌 특이한 의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자에는 책상도 달려 있었습니다. 여행하는 중에 처음으로 책상을 쓸 수 있는 순간이 왔습니다. 재빨리 저는 의자에 앉았고 편안함을 만끽했습니다. 동역사 만세.
아, 명칭 정리를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은 역명이 너무 길어 보통 두 가지로 줄여 부릅니다. ‘동역문’, ‘동역사’. 저는 보통 ‘동역사’라고 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고, 그냥 누군가가 가장 먼저 알려준 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동역사’라고 부르겠습니다.
원래부터 동역사역의 이름이 이렇게 길었던 것은 아닙니다. 계획 단계에서는 을지로6가역이었고, 세워질 때는 서울운동장역이었다가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이 완공된 후, 이와 구별하기 위해 1985년 동대문운동장역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DDP(Dongdaemun Design Plaza)의 건립이 확정되자 2007년 동대문운동장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2009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2019년 이후로는 역명에 DDP를 병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기억상 저는 단 한 번도 동대문운동장을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시작하지 않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시작합니다. 아직 DDP가 채 지어지기 전인 제 중학생 시절,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별 거 없었습니다. 한창 역사에 관심이 많이 생길 때였고, 역명에 ‘역사’가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방문해볼 가치는 충분했습니다. 아직 다 완공이 되지 않은 DDP 주변은 정신이 없었고, 발굴 당시에 확인된 서울성곽의 잔해만 조금 복원해두거나 잘 모아두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던 저는 살짝 실망하고, 성곽 잔해의 사진만 몇 장 찍고 그곳을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그 후에 이 역을 방문하게 된 것은 DDP때문이었습니다. DDP에서 열리는 여러 전시들은 제 발길을 자주 이곳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전, 팀버튼 특별전, 간송 특별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등 다양한 전시들이 열려 자주 이곳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한때 DDP의 야경을 상징하던 LED 장미정원을 보러 오기도 했습니다. 미술품들의 아름다움은 제가 동역사역을 DDP와 함께 기억하게 만들었습니다.
DDP만 보러 이 역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이름에 DDP가 병기될 만큼 동역사역하면 DDP가 떠오르는 것은 맞지만, 다른 유명한 것들도 주변에 즐비합니다. 아마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동대문 옷시장이 자리한 두산타워입니다. 하지만, 두산타워가 동대문 근처 옷가게들의 근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동대문 근처 옷시장의 근본은 평화시장입니다. 6.25전쟁 시절부터 드럼통에 군복을 염색하여 팔던 평화시장은 천과 옷가지들을 파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천이나 옷을 사본 적은 없고, 헌책방을 자주 갔습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이곳에서 샀었습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곳곳에 있는 요즘은 잘 가지 않지만, 가끔 정말 싼 값에 책을 구할 수 있기도 합니다.
동역사는 낙산공원에서 이어지는 동쪽 성곽길이 종착지이기도 하고, 다양한 먹거리의 포장마차가 주변에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동역사 근처는 이처럼 역사와 문화가 가득한 공간이고, 그 덕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동대문 근처의 모든 역사와 문화가 모여드는 이곳의 이름은 무척 길지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25년 건립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운동장으로 시작했던 동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해왔습니다. 물론, 스포츠와 관련된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 역사와 문화가 담긴 공간을 바꾸는 결단을 했고,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주변으로는 6.25전쟁 이후부터 패션의 한 축을 담당해온 동대문 옷시장이 있고, 21세기 이후 서울의 걷기 문화를 선도하는 청계천과 서울성곽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주변 밑을 지나는 지하철들의 정류장인 동역사역은 이곳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편하게 하며 늘 새로운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다른 역사에서는 볼 수 없는 책상 달린 의자가 그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계속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온 이 주변과 동역사역의 상호작용이 기대가 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