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박목월 작가의 전시관 바로 앞에 김동리 작가의 전시관으로 들어갑니다. 김동리의 작품 중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역마>입니다. 운명에 맞서는 인물의 모습을 그리는 이 소설을 저는 중학교 때 고등 국어 선행 학습을 하면서 처음 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자리에 잊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사는 사주를 가진 역마살의 의미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좀이 쑤셔 하는 성격이라 제가 역마살이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김동리의 이미지는 거의 <역마>가 전부였습니다. 아, 여행 중에 박경리 작가의 재능을 발견하여 소설로 추천했고, ‘경리’라는 필명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습니다. 딱, 그 정도가 제가 아는 김동리의 전부였습니다.
당연히 김동리는 더 많은 명작들을 남겼고, 더 깊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학관에서는 짧게나마 그의 삶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김동리가 태어나 살던 곳은 경주 성건동으로 고도(古都)의 옛 분위기가 잘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에는 무당집이 많아 토속적이고 무속적인 분위기도 물씬 풍겼다고 하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울하고 병약했던 소년 김동리는 6세 때 소꿉친구인 선이를 죽음으로 잃습니다. 이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그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어렸을 때부터 하도록 합니다. 깊은 고민을 하던 소년을 더 넓은 세계로 이끈 것은 책이었습니다. 철도원에 근무하는 친척형의 도움을 받아 도서관 장서를 한 권씩 한 권씩 독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합천 해인사와 사천 다솔사에 들어가 글을 썼습니다. 다솔사에서는 만해가 찾아와 만나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상경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해방 때까지 절필에 들어갑니다.
해방 후에는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유치환 등과 어울리며 문학이 이념에 종속되는 것을 막고, 문학 창작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쓴 <황토기>를 보면 이러한 성향이 잘 드러납니다. <황토기>는 황토골의 전설과 황토골에서 태어난 두 장사의 힘겨루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전통적인 전설과 향토적인 배경, 그리고 인간 사이의 갈등에 집중하는 작품이죠. 당시의 이념 대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작품입니다. <역마> 또한 이 시기의 작품으로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하동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이라는 운명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하는 옥화와 아들 성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이때부터 이미 한국이라는 지역의 토속적 배경을 살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김동리 작가의 작품 세계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 이후로도 그는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며 작품을 씁니다. 제 기억 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무녀도>가 대표적이죠. <무녀도>라는 작품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전혀 기억에 없었는데 줄거리를 들어보니 수능 당시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당 모화와 그의 딸 낭이가 크리스트교 신자인 욱이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이죠. 이때부터 김동리는 서양의 종교나 사상을 한국의 토속적인 종교나 사상과 대립시켜 갈등을 일으킵니다. 다만, 그의 소설은 단순히 한국의 토속적인 종교나 사상이 위대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종교나 사상과 한국의 종교나 사상이 만든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 놔두면서 이들의 대립이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김동리는 <무녀도> 크리스트교의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습니다. 한국의 무교(巫敎)가 내세우는 정신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없는 것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빠른 근대화 이후 강조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이어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크리스트교를 위시한 서양의 근대(Modern)은 많은 것을 바꿔놨습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만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인간은 모두 평등함을 말해주었습니다. 여기에 1분 1초까지 나누어지는 정확히 시간 개념, 사람마저 자원으로 활용하는 극한의 효율성, 물질과 자본만능주의를 더해주었죠, 경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국가들이 근대화를 바랐지만, 마냥 장점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근대화에서 발견된 단점들을 해결하려고 많은 국가들은 과거로 회귀했습니다. 근대화가 만든 것들을 해체하고 그 이전에 있던 것들에서 장점들을 찾아 지금의 체제에 도입하자는 것이었죠. 이걸 크리스트교에 대입하면 평등사상을 널리 알린 장점은 있으나 이단으로 대부분의 종교를 배척하며 박해했다는 단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트교와는 달리 무교는 어떤 종교와도 잘 융화하면서 포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매우 큰 장점입니다. 아마 김동리는 이러한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막 들어온 서양의 것들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기에 한국의 전통에서 이런저런 장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겠죠. 사실 이것은 동양이니 서양이니 나누지 않아도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한 이념이 다 맞을 수 없고 이전에 틀리다고 생각한 것에서 오히려 좋은 점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죠. 김동리는 여기에 민족의 개념을 더해 한반도의 역사에서 찾기 쉬운 자연과 합일하는 전통에 더욱 힘을 주었을 뿐입니다.
김동리는 계속 이러한 글을 쓰며 왕성한 작가활동을 하다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995년 타계합니다. 근대화를 위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때, 그가 발견한 토속성과 전통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자연을 마구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소통하며 하나 되어 살아가던 때의 모습을 가져왔고, 우리의 토속적인 모습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의 문학이 근대화와 각종 이념 갈등에 묶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쓰이게끔 길을 터주었습니다.
문학관을 나오고 버스를 타고 다시 경주 시내로 향했습니다. 버스는 보문관광단지를 지났습니다. 경주에 자본이 들어와 감성을 잃고 관광지화한 대표적이 사례죠. 이 상황을 보고 생전의 김동리 작가는 무척 아쉬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토속적이고 신비함 가득하던 고도(古都)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의 네온사인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었으니까요. 저 또한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경주에 오면 유적지에서 역사의 향을 맡고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세상은 변했고, 근대화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준 것을 사실인 걸요. 그럼에도 김동리의 소설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늘 근대화가 좋지 않음을 알고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한 번 쯤은 생각해보는 시간들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