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 그곳에 그는 묻혀있다

통영, 박경리

by baekja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 2시간 30분을 달려 통영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531번 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통영 박경리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통영의 가장 북쪽에 있는 터미널에서 남쪽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40분 동안 통영의 시내를 가로질러 갔는데 다닥다닥 모여 있는 건물들과 많은 시장,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감이 느껴지는 도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박경리가 태어났고, 묻혔습니다. 마지막 삶을 함께했던 원주에서 통영까지 참으로 먼 거리를 왔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 그의 삶의 흔적이 있는 곳을 한 곳 더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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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기념관은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있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허탈할 정도죠. 고갯길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념관 주위로 건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아래층에는 동네 분들이 자주 담소를 나누시는 듯한 카페가 있습니다. 그 위층으로 올라가야 전시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박경리 기념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문학관입니다. 연표와 대표 작품들을 소개한 평범한 문학관이죠. 박경리의 삶의 향은 원주에서 더욱 짙게 맡을 수 있습니다. 별 목적 없이 들리기엔 꽤 지루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럼에도 박경리의 삶을 상세히 잘 정리해 놓아 박경리의 이모저모를 알고 싶다면 방문하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원주를 갔다 왔고 박경리에 대해 한 번 썼으니 또 그 상세한 삶의 이모저모를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학관에서 봤었던 그의 몇 가지 글들과 그녀의 고향이자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으로서의 통영을 잠시 말하고 그의 묘역에 올라가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문학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바로 이점이 문학의 골자입니다. 이떤 작품에서든 갈등과 모순, 운명과의 싸움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이 문학을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에서 진심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순간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만족스럽지 못할 때가 많죠.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유심히 살피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하여 나름의 답변을 내립니다. 이전 작가들을 만나며 저는 문학이 작가들의 삶을 담았다고 확실히 실감했습니다. 작가들은 계속 삶을 살며 왜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름의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누군가는 억압된 현실에 왜를 던졌고,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우주의 법칙에 왜를 던졌으며, 누군가는 모두가 옳다고 여기는 사상에 왜를 던졌습니다. 이는 그냥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현실, 법칙, 사상에 대한 다른 관점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관점은 당연히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 갈등 혹은 그 갈등에 대한 답을 담아내는 것이 문학입니다. 즉, 박경리의 말처럼 문학은 왜로부터 시작하고 왜라는 질문으로 지탱받고 있습니다.


“문학은 삶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모든 학문은 삶의 현장이며, 삶은 모든 학문의 기초입니다. 문학은 어떠한 분야도 수용해야 하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며 사실도 아니라는 점. 그러면서도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해서 소설을 창작이라고 합니다.”


문학을 배울 때 소설의 특성 중 하나로 배우는 것이 허구성입니다. 있었던 일을 적는 것이 아닌,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적는 것, 그것이 소설입니다. 있었을 법한 일을 적기에 허구성도 가지지만, 개연성 또한 가집니다. 그 개연성을 통해 작가는 ‘왜’라는 물음에서 도출된 문제들을 작품 전면에 드러내거나 해결합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문제들은 허구의 세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 세계의 문제죠. 현실 속에서는 교묘하게 숨어 있던 문제들이 허구의 작품 속에서는 전면에 드러나며 사람들이 잊고 있었거나 잊게 하려고 했던 문제들이 사람들에게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방식은 사람들이 모르던 세상의 진실을 알려줍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이처럼 사실도 아니고 실제도 아니지만, 분명 진실만은 담고 있습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있던 개인의 이야기들,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들을 발굴하던 작업을 박경리는 늘 해오고 있었습니다.


통영을 배경으로 한 ≪김약국의 딸들≫은 박경리의 이러한 경향이 잘 드러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6.25전쟁의 전후 삭막하고 정신없는 시기, 한 집안의 몰락 과정을 통해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다니던 인간 군상들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욕망이 드러나기도 하고, 어려운 상황과 운명 속에서 환경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있을 법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개인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며 개인들이 맞닥뜨린 문제를 누군가의 피해로 해결하고 있다는 진실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김약국의 딸들≫에 더 개연성을 더하여 진실에 다가가기 쉽게 해주는 것은 상세한 배경묘사입니다. 지금은 당시의 배경과 많이 달라졌지만, 소설을 쓸 당시의 통영과 소설 속 배경의 통영은 거의 똑같아 사람들이 이입하기 쉽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김약국의 딸들≫이 써졌을 당시에는 통영을 배경으로 한 집안의 몰락을 그렸다는 것 때문에 환영받지 못했으나 지금은 통영의 문학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형이 많이 바뀌어 이곳이 딱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다.”라고 하나하나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세병관에서 박경리 생가, 서피랑까지 이어지는 지역이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배경이었다고 합니다.


20230921_160441.jpg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


통영은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기도 했지만, 박경리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통영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통영에서 보낸 박경리는 이곳에서 문학적 사상의 기반을 키웠습니다. 세병관과 충렬사를 옆에 두고 자라며 어릴 때부터 민족주의를 배운 것은 후에 그의 역사 인식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조선 시대 수군 우수영이 자리 잡았을 때부터 많은 장인이 이곳에서 일했고, 그 장인들로부터 통영예술의 토양이 갖춰졌음을 대담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통영은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곳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고향이란 인간사와 풍물과 산천, 삶의 모든 것의 추억이 묻혀있는 곳이다. 고향은 내 인생의 모든 저산이며 30여 년간 내 문학의 지주요, 원천이었다.”


자신 인생의 자산이자 문학의 원천이었던 바로 이곳 통영에 박경리의 육신은 묻혀있습니다. 예쁘게 잘 만든 길을 따라 기념관 뒤 언덕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박경리 묘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미련 없이 떠난 그의 무덤은 소박했고, 조용했습니다. 언덕 아래로는 좁은 논과 작은 마을과 포구, 섬들과 그 사이로 나아가다 육지에 막힌 바다가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종종 현세가 그리울 때면 이곳에 내려와 풍경을 즐기겠지요. 모든 물질에 대한 미련을 버렸을지언정 땅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버리지 못했을 테니까요.


작가는 늘 글을 쓸 수밖에 없어서 썼다고 말했습니다.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다고도 말했습니다. 그가 다른 세상에서만큼은 유명한 대문호가 아닌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사는 범인이기를 바라며 묘소에 가볍게 합장을 하고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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