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러브 레터>에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뜻하지 않은 이유로 헤어져 버린 슬픔과 아쉬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사랑 이후에 남은 슬픔과 아쉬움을 털어내는 과정까지 보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한 톨의 남은 마음을 저 다 주어야 했던 이야기는 아름답고 이상적이었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여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처음에 나의 모든 것을 줄 듯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가며 불평불만을 내뱉고, 준다는 행위보다는 받는 데 집중하기 바쁩니다. 이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외의 조건들에 이 사람이 도움이 되는지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냉혹한 잣대에 그 사람의 평가는 길가에 지나는 한 사람보다도 못하게 됩니다. 서로 달라 느껴졌던 설렘은 서로의 차이를 명확히 하는 불편함으로 만듭니다. 그 불편함 끝에는 분노와 짜증만이 남고, 후에는 후회가 남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차이로 인해 불편함을 느꼈고, 분노와 짜증을 내뱉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클레멘타인에게 한 말을 기점으로 헤어집니다. 홧김에 한 말이었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을 듣고 나서 클레멘타인은 무척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웁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조엘은 홧김에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웁니다. 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클레멘타인과 쌓아온 추억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톺아봅니다. 처음에는 갈등만 가득했던 기억들은 과거로 갈수록 행복이 가득한 기억들로 바뀝니다. 조엘은 저항합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에 클레멘타인을 숨기기도 하고, 클레멘타인의 기억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기억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하지만, 기억을 지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후회만을 남기며 작별인사를 마지막으로 잠에서 깹니다. 그리고 조엘은 더는 클레멘타인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다 줄 것처럼 행동했고, 정말 다 주었던 둘의 사이에서 평온함, 설렘, 행복함은 사라지고 분노와 짜증이 들어왔다가 후회와 슬픔만 남습니다. 그리고 분노와 짜증, 후회와 슬픔이 번갈아서 찾아오다 너무 힘들어진 둘은 앞의 행복했던 추억들은 생각하지 못하고, 기억을 삭제하는 데 동의합니다. 자신들의 상처가 어우러진 기억들을 삭제하는 선택은 영화에서 나오는 니체의 명언과 완전히 부합합니다.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근데 여기서 말을 좀 바꿔볼까요?
“망각하는 자는 저주받았나니 자기 행복조차 잊기 때문이라.”
기억을 지운 클레멘타인과 기억을 지우는 조엘의 모습은 밑에 말과 오히려 부합합니다. 먼저 기억을 지운 클레멘타인은 자신이 잃은 기억으로 인해 계속 혼란스러워하고, 조엘은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려 무척 애를 씁니다. 암만 봐도 그들의 선택은 잘못되었다고밖에 할 수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 그들은 기억을 잃기 전 녹음한 테이프들을 들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다시 관계를 맺으려는 것을 포기하려 합니다. 사람이 변한 것은 아니기에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안 거죠. 하지만, 기억 속에서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자 결심했던 그리고 많은 후회를 했던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클레멘타인에게 기다려달라 말하고,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향해 쏟아내는 말에 그저 애정을 담은 시선으로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사랑을 시작합니다.
조엘의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변했던 것은 헤어질 즈음의 조엘이겠죠. 다 주고 싶었고, 다 주지 못해 후회했던 클레멘타인과 만났던 처음으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레며 괜찮던 그때로. 아마 조엘은 또다시 변할지도 모릅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여전히 잘 맞는 이들이라고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이런저런 조건과 말들을 들이밀면서 클레멘타인을 자신에게 맞추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외부의 조건과 환경을 이야기하며 클레멘타인을 바꾸려 하는 작업은 그녀와 나를 맞추어 가는 작업이 아니라 그녀의 삶을 한정하고 그녀 자체를 부정하는 작업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이기적이고 사랑을 주기 이전에 받고 싶어 하기에 조엘은 실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엘은 이제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랑을 주겠다는 초심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관계가 갈라지기 전에 돌아올 겁니다. 사과하고 다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사랑이란 건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삼키고, 다 주기 위해 노력하는 곳 현대 사회에서 속된 말로 ‘호구’라고 칭하는 이의 행동입니다. 사실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호구’가 되기는 쉽습니다. 이미 좋아하는 대상을 칭찬해주고, 잘 대해주는 데 어려움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다릅니다. 사랑은 더 어려운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싫어하는 점이 보이더라도 인정하고 포용해주어야 하니까요. 말 그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한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과연 이걸 해낼 수 있을까요? 저 또한 이 기준에 따르면 사랑을 제대로 했는가에 대한 의구심만 듭니다. 여전히 사랑은 너무 복잡하고 힘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