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팅힐
얼마 전 잠을 자다 한 여성 소꿉친구의 손에 이끌려 이 거리 저 거리를 구경하는 꿈을 꿨습니다. 따뜻함과 설렘 가득했던 꿈은 좋았지만, 꿈에서 본 여성 소꿉친구의 얼굴은 본 적도 없는 사람이기에 현실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소꿉친구와 천천히 불 밝혀진 상점들을 구경하며 사소하지만, 정겨운 담소를 나누는 것. 꽤 연말에 생각할 수 있는 낭만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겐 꿈이고 멋진 사랑이라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하나의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처럼 누구나 해볼 법한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스크린에 담아낸 영화가 있습니다. <노팅힐>입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탑 배우인 애나와 평범한 여행 전문 서점 주인인 윌리엄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애나는 둘의 만남과 첫 키스 이후 서로 급격히 가까워지지만, 애나의 남자친구 문제나 여러 사생활 문제로 가까워지려 할 때마다 멀어집니다. 그렇게 닿을 듯하면 꿈결처럼 사라지는 애나를 볼 때마다 윌리엄은 정성과 부드러움으로 대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이때까지의 윌리엄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오렌지 주스가 흘러 곤란한 애나에게 자신의 욕실을 제공하고, 애나를 보기 위해 기자임을 가장하고 인터뷰장으로 숨어들기도 합니다. 애나를 욕하는 이들에게 대신 화를 내주며, 스캔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애나를 위해 피난처를 제공해줍니다. 몇 번을 홀대당해도 촬영장으로 찾아가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넵니다. 영화 내내 그가 애나를 보는 눈은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정도입니다.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줍니다. 자신의 집이 피난처인 것이 밝혀지고, 기자들이 몰려오자 이 집에 들어온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애나에게 윌리엄이 하는 말은 이 모든 행동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당신이 날 찾아온 걸 항상 기쁘게 생각할 겁니다.” 그냥 당신이 찾아온 것이 기쁘다는 거죠. 조건 없이 주는 이상적인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애나가 평범한 어느 길가의 웃음 많은 착한 빵집 점원이었다면 아마 이 사랑 이야기는 시시하지만, 즐겁고 행복하게 잘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애나는 할리우드의 탑스타였고, 고려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은 늘 윌리엄을 향하고 있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자신의 연애 조건 때문에 그만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늘 자신을 바라봐주는 윌리엄에게 푹 빠져버린 애나는 윌리엄의 서점에 와서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제 사랑에 있어서는 윌리엄만을 볼 준비가 된 상태로요.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하던가요? 이번엔 몇 번의 홀대에 지친 윌리엄이 유명세라는 외부 조건을 들며 애나의 고백을 거절합니다. 거절당한 후 애나가 하는 말은 애나가 윌리엄을 사랑하는 데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드러납니다.
“유명한 거 그거 다 허상이에요. 잊지 마세요. 나 역시 소년 앞에서 사랑을 구하는 소녀일 뿐이에요.”
이 말을 듣고 친구들과 고민하던 윌리엄은 친구 맥스의 차를 타고 애나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가는 길은 좌충우돌 그 자체입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기자인 척 가장하며 사회가 정한 규칙을 모두 사랑의 뒤에 두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애나밖에 없다는 듯이 뛰어갑니다. 간신히 기자회견장에 자리 잡은 윌리엄은 질문으로 애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애나는 그를 용서하고 그의 고백을 다시 받아줍니다. 그리고 영국에 얼마간 머물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indefinitely(무기한으로)”라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 후 둘을 향해 카메라 플래시가 마구 터지지만, 그 둘의 눈은 서로에게 고정되어 있고, 얼굴은 함박웃음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 어떤 외부적 상황도 상관없이 사랑하는 서로만을 추구하는 서로의 눈빛은 사랑 그 자체로 보입니다. 그렇게 서로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며 이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들의 사랑은 그냥 서로입니다. 애나에겐 윌리엄이고 윌리엄에겐 애나인 것이죠. RADWIMPS의 <カナタハルカ>라는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でも恋は革命でも焦燥でも天変地異でもなくて君だった(하지만 사랑은 혁명도, 초조함도, 천변지이도 아닌 너였어).” 사랑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혁인 혁명도 아니고, 감정의 일종인 초조함도 아니며 세상을 거꾸로 뒤집을 만한 천재지변이나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너’라고 말하는 이 가사는 윌리엄과 애나가 마지막에 보여준 사랑의 본질을 말하는 듯합니다. 어떤 수식어도 상관없이 사랑하고 있는 무언가, 그 사람의 조건, 환경, 외면, 내면의 정체성까지 포함한 존재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꽤 단순한 답변이지만, 당연한 말이기도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무언가는 하나의 대상으로 설명이 불가하니까요. 대상을 넘어 내 인생에서 사라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사랑하는 존재를 넘어 사랑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저는 마지막 애나와 윌리엄의 눈빛과 미소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사랑의 명확한 정의를 알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마 평생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처음 냈던 물음 중 하나 “나는 잘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러브 레터>의 리뷰를 쓸 때 썼던 첫 문단에 “제 맘대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제가 생각대로는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연애였습니다. (…) 기쁨과 설렘, 즐거움을 얻었는지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 자체를 조건과 환경에 개의치 않고 바라봐줄 수 있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맘대로’, ‘제 생각대로’ 연애를 하려 했고, 감정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실 좋은 감정은 한 존재를 전력으로 사랑하여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부터 따라오는 거지 사랑을 수단으로 놓고 감정을 목적으로 놓은 순간부터 실패했던 거겠죠. 마치 마약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기 위한 사랑의 끝에 남은 것은 <이터널 선샤인>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지루함과 답답함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세 영화를 보고 남은 저의 생각은 제 이번 연애에서 저는 사랑을 잘못했습니다. 첫 연애를 반면교사로 삼아 너무 복잡하게 연애를 하려고 했죠.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어떠한 사상도, 기술도, 감정도, 현상도 아니라 그냥 내가 사랑하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제게 다음이 있다면 적어도 이 생각만큼은 잊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