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라는 말. 너무나 익숙한 말입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우리가 하고있는 모든 것.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것은 보통 '일상'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간신히 씻고, 햇빛을 쬐며 출근길을 걱정합니다. 길고 긴 터널 같은 출근길을 지나 정해진 시간동안 일을 합니다. 가끔은 야근을 하고, 집에 퇴근해 조금 쉬다 잠에 듭니다. 모두의 생활에 박힌 법칙과도 같은 이 삶의 방식을 우리는 '일상'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 일상이라는 말은 생긴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년 365일을 그 어떤 자연의 영향에도 상관없이 동일한 삶의 방식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서 아주 조금에 불과합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절단하여 24시간으로 만들고, 정해진 틀에 맞게 나누어 삶을 살아가게 된 것도 빨라야 근대 이후죠. 그래서 우리는 효율적으로 많은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게 되었지만, 더 많은 시간을 반복에 찌들어 살게 되었습니다. 아주 더운 여름이든 아주 추운 겨울이든 우리가 하는 일은 크게 변하지 않죠.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종종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저 한 기계 안의 기계 부품일 뿐이라고.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몇 주 전, 일하던 와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집 앞 산에 걸리는 수묵산수화 같은 구름도, 새벽의 선선한 공기를 가르는 빗소리도, 더운 여름의 열기를 뚫고 한참을 올라가 있는 푸른 하늘도 제 시야에서 사라졌고, 제 생각에서 사라졌습니다. 무기려해졌고, 끝내는 우울해졌으며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떠밀려 벼랑 끝에 서있는 느낌이 간만에 들었습니다. 이 순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해 회사에서는 늘 피곤해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간만에 마주한 공황의 구렁텅이 그 앞자락에서 어쩔 줄 몰랐던 제가 마주했던 건 한 유튜브 영상이었습니다.
인터넷 방송인들이 모여 다같이 게임을 즐기는 대형 서버가 있습니다. 어떤 서버에서는 그 방송인들이 모여 각자 역할을 정하고, 그 역할에 맡게 역할극을 하기도 합니다. 설정과 이야기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은 있지만, 대본이 크게 짜여 있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역할을 맡아 순간순간 상황에 맞게 해나가는 그것을 RP(Role Playing)라고 부릅니다. 많은 방송인들이 모이니 많은 이야기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죠. 물론 거기서도 주류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버에서 가장 큰 세력들인 경찰과 갱이 싸우는 이야기가 보통 주류가 되고, 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서버의 주역이 됩니다. 이 이야기들이 현실로 말하자면 보통 기록으로 적힌 역사입니다. 역사책에 적힌 세상을 바꾸고 이끌어간 자들의 이야기. 그러나 인류의 기나긴 발자취에서 기록된 역사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적히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봤던 영상은 그 서버에서 어쩌면 적히지 못했을 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방송인이라 뒤늦게 서버에 들어온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노가다꾼으로 시작한 그는 돈이 영 벌리지 않아 낚시꾼을 하기 위해 해변으로 향합니다. 향하는 와중에 택시기사가 운전을 못해 택시가 뒤집히는 사고 끝에 낚시를 시작한 그는 실망합니다. 직업을 바꾸고 바꾼 끝에 그가 정착한 직업은 택시기사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택시기사들과 경쟁하며 콜을 따내는 모습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네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힘들게 돈을 벌었으니 돈을 좀 쓰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메이드 카페로 향합니다. 거기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는 메이드 카페를 가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쓰는 그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평범하게만 살았다면 제게 그는 그냥 지나가는 행인1 정도로만 인식되었을 겁니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택시 기사라는 직업에 정을 붙였습니다. 서버의 끝으로 향할수록 사람들은 대부분 자차를 가지기 시작했고, 택시 콜은 점점 줄어들어 동료 택시기사들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돈벌이가 되냐는 손님들의 질문에 돈이 안 된다고 대답할 정도로 그의 삶은 점점 어려워졌음에도 "직업이 이거니까.", "누군가는 해야 되니까."라는 말을 하며 직업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더해져 그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자기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부심을 잃기 시작했고, 이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다가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자신의 직업을 탓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모인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으나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음에 좌절하고 우울해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속에 낭만을 품고 계속 택시 기사로 살고자 했습니다. 혼자 남은 밤바다에서 지나가는 행인과 이야기하며 자기가 택시 기사임을 다시 깨달았고, 그것이 낭만임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불안했을 겁니다. 콜은 거의 오지 않고, 찾는 이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오랜만에 콜을 받고 택시 기사일을 하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아직 자신을 찾는 이가 남아있다면서요.
서버의 마지막 주류 서사인 경찰과 갱의 마지막 전쟁에서 전쟁을 앞두고 택시 회사는 문을 닫습니다. 그의 마지막 낭만이자 모든 것인 회사가 사라졌을 때 그는 크게 좌절합니다. 전쟁을 왜 하는지도 모르지만, 전쟁은 늘 그렇듯 사람들의 일상을 빼앗아 갑니다. 자신의 삶을 우울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었을 지언정 세상을 살아가게 했던 그 일상을 빼앗는 전쟁은 늘 평범한 이들에게 참혹하고, 무자비합니다. 택시 회사가 사라졌음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콜을 받고, 택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즐거워하죠. 전쟁이 시작된 후 그는 경찰의 편에 서나 그의 역할은 아무것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참여 안 하고 그저 음악이나 들으면서 춤을 추고 시간을 보냅니다.
나름 일상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고, 좋은 직업 의식으로 마지막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전쟁의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그는 그를 태웠던 손님들이 죽은 것을 슬퍼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자기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무척 큰 허탈감에 사로잡힙니다. 그의 삶은 여기까지 사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우리가 볼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려 노력했고, 좌절도 있었지만 끝까지 일을 붙잡았습니다. 붙잡은 일의 마지막엔 사실 큰 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종종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있죠. 노력은 언젠가 나를 보상해준다지만, 그 밑도 끝도 없는 허탈감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저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나름 열심히 일했는데 남는 것은 없고, 꼬박꼬박 밀려드는 것은 월말의 가스비와 관리비 청구서, 카드 명세서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마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저는 더더 절망감에 빠졌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RP를 가지고 행하는 게임 서버에서조차 평범한 일반인으로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해도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현실을, 기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차가운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으니까요.
깊은 허탈감에서 그를 다시 일깨운 것은 택시였습니다. 해변가의 노란 차를 보고 택시인가 싶어서 달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차는 택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차 옆엔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낚시를 하러 갈 때 태워준 택시 기사이자 메이드 카페에서 매일 보았던 메이드이면서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 그 말도 안 되는 우연적 만남은 앞의 여러 우연들을 모두 엮어 필연으로 만들고, 그들의 인연이 운명으로 향하게 합니다. 삶의 대부분의 순간을 택시 기사로 보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로 삶을 버텨가던 그는 사실 그가 세상의 서사에서 조연임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 누구도 나를 주목해주지 않는 조연. 홀로 쓸쓸이 무대에서 퇴장하는 조연으로 끝날 것이리라 생각했을 거고, 자기 삶이 과연 가치가 있었나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필연이자 운명이었던 만남은 적어도 한 사람에게 만큼은 내가 가치있는 사람이고, 무대의 주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평범한 평범하디 평범한 삶에서 만들어진 우연으로 인한 기적. 그 기적 속에서 그는 '택시 기사 마카오박'이 아닌 '마카오박'으로서 삶의 가치를 오롯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 마카오박씨 한 시간 일하면 얼마나 벌어요?"
"얼마 못벌어요."
"4억으로는 몇 시간 살 수 있어요?"
"계산을 안해봤는디.. 근데 뭐 대충 생각해보면... 100년 정도?"
"그러면 제가 마카오박씨 100년 사도 돼요?"
"나야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깐. 난 택시기사니까요."
이 말은 언뜻보면 그저 낯간지러운 사랑 고백으로 보일 뿐이지만, 그동안 마카오박이 해왔던 택시 기사일을 전부 긍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매번 택시 기사라는 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되새겼습니다. 자신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늘 말해왔지만,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남이었습니다. 자신의 택시를 찾아주고 정당한 대가를 내는 그 행위에서 그는 자기 직업의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옆의 한 사람이 정당한 대가를 주고 자신의 100년을 사고자 합니다. 한순간 왔다 떠나가는 손님은 자기 직업에 대한 순간의 증명일 뿐이지만, 평생을 머무르며 자신의 가치를 평생 증명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전 서버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의 노고를 향해 박수를 쳐주는 것도,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인정만큼은 받았습니다. 뉴스에 뜰만한 이야기도, 역사에 기록될 이야기도 아니지만, 기적 같은 이 순간. 평범한 기적의 순간입니다.
평범한 기적의 순간에 저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어쩌면 현실 도시의 일상을 사는 무수한 사람들처럼 평범한 우울감에 젖어 소외된 채 서버를 마무리했을지도 모르는 그에게 마지막에 보상을 준 것은 평범한 우연의 연속에서 만들어진 기적이었습니다. 이를 보며 열심히 살면 언젠가 내가 모은 우연들이 필연처럼 찾아와 운명같은 행복을 던져줄 지 모른다는, 잊고 있었던 평범한 기대감이 제 마음속에 차올랐습니다. 우울과 불안을 몰아낸 그 기대감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했습니다. 푸른 나뭇잎에 부딪혀 부서지는 햇살, 아파트 복도를 지나가며 웃는 사람들의 웃음, 출근길에 가득 핀 하얀 감자꽃 등 제 마음에 휴식을 선사했고,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재미난 것, 좋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저는 일상의 즐거움을 되찾았습니다.
춤춰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듣는 이 없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의 이 시처럼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삶에서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하고, 한 번 받은 상처는 잘 지워지지 않으며, 돈은 늘 필요합니다. 또한,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매일 살기에는 제 열정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낭만을 가지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 낭만 끝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죠. 전쟁 통에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었고, 오해로 인해 상처받았으나 진심을 다해 사랑했고, 어디서나 누구를 태우고 움직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고, 손님과 대화를 즐기며 할인과 공짜 운행을 퍼주었으며, 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거처럼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삶이 만약 허탈감에 가득 찬 결말로 끝났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보았다고 해도 저는 그냥 서글픔 속에 '아, 삶은 어쩔 수 없는 건가.'라는 말을 되뇌이며 아직도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이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찬 채 마무리되었기에 저는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하루하루 평범한 기적을 찾아나가면서요. 이 삶의 끝에서 저는 마카오박처럼 말하며 끝낼 수 있다면 참 좋을 듯합니다. 기대감에 대한 들뜸은 내려놓았지만, 지나온 시간의 만족감이 주는 행복에 휩싸인 채로요.
"아, 아저씨. 다음 생애엔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살아요."
"고마워요. 근데 이미 이뤘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