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직격한 이번 태풍 ‘링링’은 처음엔 약했지만 결국 강해져 한반도를 직격해 얼마간의 재산피해와 사상자를 냈다. 다행히 군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이번 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이글을 시작한다.
태풍이 강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한반도를 직격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어 부대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미리부터 하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유리창 및 문 상태 점검부터 순찰을 통한 취약지역 확인 같은 것부터 시작해 군견반의 천막을 걷어내는 등의 다양한 대비를 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강해지는 태풍의 강도와 바람은 우리의 걱정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태풍이 오기 전날 다른 저기압의 영향으로 이미 아침부터 비가 오고 있었고 이 비를 맞으며 근무에 들어갔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으나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순찰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우의를 입지 못한 전투복 바지는 다 젖었고 순찰함에 넣어야할 순찰 카드는 넣는 동안에 비에 적셔져 너덜너덜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만에 느끼는 비의 시원한 촉감에 비가 반갑기도 했다. 비는 아침부터 시작해 강할 때는 꽤 많은 양을 쏟아냈고 약할 때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며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창문 밖에 내리는 비를 보다가 늦은 밤에 다시 근무에 들어갔다. 뉴스에서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막 끝나고 태풍 속보로 전환되는 중이었다. 새벽 2시에 제주도에 가장 가까워질 것이라는 그 태풍은 이미 제주도를 비바람으로 휩쓸고 있었다. 제주도의 상황을 생중계하는 기자의 안경에는 빗물이 맺혀있었고 머리는 모두 젖어 미역처럼 흩날렸다. 그런 기자의 불쌍한 모습에 2010년 중부지방에 내린 폭설을 맞으며 눈사람이 되어가던 K본부의 김대기 기자가 떠올라 기자들의 직업정신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불쌍하다는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백령도에도 이미 비는 쏟아지고 있어 순찰을 못나가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지루함에 지쳐버린 나는 CCTV를 들여다보며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CCTV에 보이는 건 어둠이 내려앉은 부대의 철조망이 아닌 그저 비였다. 아마 비가 내리는 모습이 CCTV에 찍힌다면 <빗속의 이타케 다리>라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처럼 비가 대각선으로 속도감 있게 내려오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CCTV에 보이는 비의 모습은 양동이를 CCTV 앞에서 내리붓는 모습에 가까워 신기했다. 밖에 있지 않았지만 지금 내리는 비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규칙적인 직선은 사람의 것이고 불규칙적인 곡선이야말로 자연의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이야 말로 자연의 느낌을 제대로 담아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쨌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근무는 마무리되었고 태풍이 온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로 잠이 들었다.
일어난 것은 12시, 해가 중천에 떠있을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밝았어야할 밖이 어두운 회색 빛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며 태풍이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천천히 준비해 근무를 가는 길엔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바람 때문에 비가 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앞에서 오는 느낌이었다. 2시에 태풍이 백령도에 가장 가까워진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군견의 무사함을 확인하기 위해 견사장으로 갔다. 견사장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사람이 바람에 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세게 불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 공포심을 뒤로 하고 군견들을 만났을 때 군견들은 만나서 반갑다고 짖어서 약간은 김이 샜다. 그리고 본부로 돌아와 한발자국도 안 나가고 CCTV만 계속 봤다.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 때문에 자꾸 돌아가는 CCTV의 시야와 이러 휘청 저리 휘청거리는 나무의 모습에 정말 태풍이 왔구나 싶었다.
태풍이 소강상태처럼 보이는 시간이 오자 순찰을 돌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안타깝게도 태풍은 소강상태라고 보기는 힘들었으며 여전히 강한 비바람에 애먹을만한 정도였다. 전날 아침처럼 순찰카드는 다 젖기 시작했고 바람에 나무가 격하게 흔들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순찰로에는 깨진 유리문, 떨어진 문짝, 꺾인 나무가 생각보다 많아 순찰하는 데 약간 애를 먹었다. 한 20분쯤 돌았을까? 복귀하라는 무전이 와서 복귀했는데 이미 바지와 우의가 모두 비에 젖어 비에 젖은 생쥐 꼴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근무가 끝나고 생활관으로 돌아가 쉬다가 새벽에 다시 근무에 들어갔다.
새벽에 보는 부대의 모습은 태풍이 얼마 전에 쓸고 나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조용했다. 여전히 제자리를 잃어버린 나뭇가지와 나뭇잎은 길에 아무렇게나 나부끼고 있었고 원래라면 시끄러워야할 풀벌레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만 빼면 겉으로는 대충 원래대로 돌아왔다. 참 신기했다. 그 거대한 비바람 덩어리가 스치고 지나갔는데도 별 거 없다는 게. 그리고 별 변화 없이 사람의 세상은 똑같이 돌아간다는 게. 태풍이 이 한반도를 지나간 것은 아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겠지만 여전히 사람이고 생물이고 멀쩡히 살아남아있다는 것은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폭풍전야의 조용함과 폭풍의 강렬함, 그리고 그 후의 침묵. 이 침묵은 별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안도의 침묵일 수도, 피해를 봐서 애통한 고통의 침묵일 수도 있다. 쨌든 태풍은 지나가고 사람들은 원래의 삶을 다시 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늘 돌던 새벽 순찰을 마무리하자 결국 나도 태풍이란 변화에 큰 동요하지 않고 계속 내 할 일을 해나가야만 하는 톱니바퀴 속에 사는 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결국 나는 별 볼일 없지만 태풍에 살아남았고 내일을 더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는 안도하며 천천히 생활관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