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지난주에 거금의 적금을 타서, 벼르고 벼르던 고가의 백을 샀다.
여자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브랜드의 최고급 사양.
할부 없이 일시불로 결제했다는 점도 나름 뿌듯했다.
오늘은 그 가방을 처음으로 들고나가는 날.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졌다.
어릴 적처럼 굳이 뽐내지 않아도,
친구들이 알아서 예쁘다, 멋지다, 부럽다고 말해 줄 거라 믿었다.
그 말 몇 마디면,
십 원 단위로 아껴 쓰며 적금을 안 빼먹던 나날들이
보상받는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하니까 괜찮네.”
다들 예쁘다고 말해주는 와중,
한 친구가 툭 던진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찬물을 끼얹은 듯 기분이 묘해졌다.
애써 웃으며 다른 친구들의 말을 들으려 했지만,
그 친구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너는 하니까 괜찮네.”
가벼운 미소, 무심한 말투.
그 순간,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괜찮네?’ 원래는 별로라는 뜻 아닌가?
내 노력과 성취를 하찮게 여기는 말처럼 들렸다.
물론, 세상 모든 여자가 그 가방을 좋아하진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봐줄 만하다’는 식으로 내 기분을 망칠 필요가 있었을까?
특히나 평소에 스타일 좋다고 생각했던 친구라
그 말은 더 크게 와닿았다.
내가 싫은 건지,
아니면 이 가방이 싫은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잠시 그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건 그냥 가방이 아니었다.
로망이었다.
그리고 그 로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나는 꽤 오랫동안 참으며 살았다.
그걸 친구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 말 한마디로 다 지워져 버린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물처럼 빛나던 그것이,
갑자기 바랜 듯 보였다.
그동안 아껴 쓰며 궁핍하게 버텼던 나날도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혹시, 나는 지금 엉뚱한 화살을 내 안에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친구는,
정확히 내가 약해질 곳을 알고 쏜 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언짢았다.
모두가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중인데,
나도 모처럼 얻은 기쁨을
그냥 인정해 줄 수는 없었을까?
굳이 그렇게라도 말해야 속이 시원했을까?
사실,
친구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잘되는 걸 못 봐주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무방비로 상처를 받는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웃으며 넘긴 말들 속에도 꽤 많은 무례가 숨어 있었다.
다시 가방을 바라봤다.
여전히 예쁘다.
그리고 나는,
그걸 내 힘으로 샀다는 게
자랑스럽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적어도,
“내 기분 망치지 말아 줄래?”
그 정도는 말했어야 했다.
나는 비록
소심하고, 소극적인 평화주의자라 할지라도
이제는 누가 던진 무례한 말에 휘둘리지 않기로 한다.
상대의 기분을 지켜주는 게 예의입니다.
예의 없는 사람에게는
내 감정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럼요,
개 짖는 소리는 안 듣는 걸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