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만년필을 처음 마주 했을까. 사람마다 기억의 차이가 아득하실 테지요.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 낸 숙제는 늘 네 줄짜리 노트 칸에 맞추어 필기체와 인쇄체 알파벳을 펜촉으로 채워 가야 했다. 검은색이나 청색 잉크에 펜촉을 찍어 서툰 필체를 옮겼다. 병에 담긴 잉크가 쏟아져 공책이나 손이 잉크 범벅으로 된 적이 수 없이 반복되었다. 이 실수를 덜고자 줄어든 잉크병 속에 자른 스펀지를 넣어 불상사를 줄이고자 허덕였다.
당시 부러움의 대상은 당연히 만년필을 가진 동급생이다. 알파벳 몇 개 적고 잉크를 찍어 쓰는 우리와 달리 한 페이지를 다 채워도 계속 쓰는 펜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뒷 뚜껑 열고 튜브를 눌러서 잉크 보충하는 것과, 본체 뒷부분을 돌려 액을 채우는 이들은 반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사야 할 학용품 중 으뜸이었지만 내 손에 만져진 것은 일 년이 지난 때였다. 이 시절 학교 정문 앞에는 중고 만년필 판매 상인들이 학생들에게는 지나칠 수 없는 관심사였다. 파카, 아피스 등 누구는 무슨 만년필을 쓰고 어느 아이는 이번에 무슨 펜으로 바꾸었노라 이 반 저 반 금세 소문이 강물에 돌덩이가 던져진 잔물결처럼 퍼졌다.
몇 달간의 교통비로는 모자라는 비용이었다. 왕복 십이 킬로미터 거리를 버스 대신 걸어 다니는 선택으로 모인 돈은 종잣돈이 되었다. 드디어 마련한 만년필, 이 필기구는 친구들의 새로운 볼거리다. 한 번의 잉크 보충으로 몇 날을 써 나갈 수 있으니 글쓰기 능률이 올라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그토록 기다려 마련한 만년필에 대한 사랑도 오래가지 않았다. 자전거로 통학하는 날 비가 오래도록 내리지 않은, 바닥이 울퉁불퉁한 흙길 도로의 먼지는 까만 교복 상의를 하얀 눈이 내린 듯 만들었다. 동네 입구 다리 위는 쉼터요, 옷차림을 바로 잡는 중간 도착지다. 오로지 겉옷 뽀얀 먼지를 털어 낸다는 생각으로 다리 난간에 몇 번 상의를 내리친 순간, 그제야 만년필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하고 호주머니를 살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만년필은 뚜껑이 깨지고 여기저기 조각이 떨어져 잉크가 새어 나왔다.
한동안 입만 벌린 채 왜 그랬을까를 되뇐다. 다른 어떤 물건보다도 자주 꺼내보고 상의 깊숙이 챙겨 넣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필기구가 한순간의 망각으로 더 이상은 제 역할을 못하게 만들었다.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한 동안 만년필은 손에서 떠나 있었다.
90년대, 첫 직장에서는 갖가지 볼펜이 책상 위에 뒹굴었다. 그런데 작성해야 하는 문서 중에 영구 기록물은 몇 년 세월이 지나면 변색이 되는 필기구의 사용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년필이 필요해 당시 많은 이들이 선호했던 제품 사용에 동참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서류를 작성하였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련한 새 필기구는 빈칸을 채워나가는 도구로 한동안 자신의 역할을 이어갔다.
시간은 세대에 따라 또 다른 도구의 등장으로 책상 속에 머무는 추억으로 남는다. 문서는 컴퓨터의 등장으로 저장 매체가 바뀌어 잉크가 들어가는 만년필의 가치가 소용돌이치는 파도처럼 사라졌다. 밀려가는 조개껍질 마냥 자신의 효용을 잃는다.
퇴직을 앞둔 시점에 아들이 생일 선물로 갖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묻는다. 옛 생각이 떠올라 고가의 만년필을 면세점에서 눈 여겨 살펴본다. 요즘은 잉크가 아예 교체용으로 튜브 형태로 따로 판매되었다. 손에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면서 일 년에 몇 번이나 뚜껑을 열게 될까.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택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결국 마음을 접었다.
글쓰기는 펜이 정석이다. 원고지 한 칸 한 칸을 채워 나가는 재미와 펜 끝에 사각거리는 촉감까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점점 만년필을 사용하는 이들은 줄어든다. 풀리지 않는 매듭 때문에 쓰던 종이를 구기거나 찢는 수고도 든다. 새롭게 앞페이지를 이어갈 필요도 없다.
이제는 펜도 노트도 뒤편으로 사라지고 자판을 두드리는 독수리 타법의 엉성함이 대신한다. 원고가 곳곳에 갈무리된다. 문서와 만남을 기약하고 파일로 서랍장 칸을 나누듯 저장 도구에 방마다 여럿 두고 글이 채워진다.
아득한 시간 속에 그리운 첫 만년필의 기억처럼 누구에게나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산 만년필은 나만의 명품 펜이었다. 서랍 속에 먼지가 채워진 그 옛날의 손때 묻은 필기구를 꺼내본다. 잊혀 지낸 나만의 영혼이 또다시 꿈을 이어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