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대지에 흠뻑 적셔주는 봄비는 생명력이 넘치게 한다. 처마 끝 마당에는 헝클어진 머리를 헤집고 단장을 하듯 뾰족뾰족 잔디가 고개를 내민다. 일찍이 겨울바람을 견디고 봄소식을 전한 대문 밖 매화나무는 꽃잎을 떠나보내고 나뭇가지에 작은 옷을 입힌다.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고개만 들면 곳곳이 봄의 향연이다. 꽃눈이 생기는가 싶더니 며칠 새 높아진 기온과 더불어 꽃봉오리가 두 손을 활짝 펼쳐 가로수마다 연분홍 치장을 하였다. 화사함도 잠깐인가. 시샘이라도 한 듯 난폭한 비바람에 우수수 도망치는 발걸음으로 배수구 바닥에 하나둘 엎드린다.
아내와 딸의 재촉에 겉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몸은 따라 가지만 마음은 혼란스럽다. 몇 개월 전에는 딸이 예약까지 해 둔 곳에 들어섰다가 대기실에서 행방을 감춘 적이 있었다.
외모에는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중년의 삶을 지향하는데 모녀가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는다. 얼굴 잡티와 미간의 주름을 못마땅해한다. 주변 사람 중에는 병원에 다녀온 후 인상이 달라졌다며 나에게 으름장까지 놓는다. 어쩌면 가족의 사랑 표현이 지나쳐 나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것인지 모른다.
병원 대기실에서 상담 순서를 기다린다. 스스로 눈꼬리가 올라가는 인상이다. 곧이어 내 차례다. 이마와 눈썹 사이에 따끔한 주삿바늘 세례를 기다려야 하는가 보다. 누구를 위한 고통인가. 소독약이 묻은 솜이 지나가고 바늘이 얼굴에 꽂힐 때마다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아픔이 전달된다. 자기만족과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런 통증을 견뎌내는 사람들이 위대해 보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몇 차례 의사의 얼굴 공격이 끝났나 보다. 간단하게 시술 내용과 주의 사항을 듣고 병실 문을 돌아서는데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몇 주 후 있을 첫 만남의 자리에 상대방 어른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평소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감추고, 현대 의술을 동원하여 인위적인 얼굴을 보이는 게 바람직한가.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보다는 갖추어진 내면이 중요하다. 남에게 보이는 반반함은 길게 가지 못한다. 투입된 약제의 유효 기간은 정해져 있으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더 강력한 처방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내성과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상처를 앓는 이들의 영상을 접한 적도 있다. 아름다움이 고통을 함께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건물 계단을 내려오면서 굳게 다짐한다. 오늘 이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얼굴에 약물의 도움을 받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미를 우선시하는 이들에게 부러움을 보낸다. 그토록 큰 아픔을 주기적으로 당하는 그들이 대단해 보인다. 외모에 치중하는 세태라지만 시대에 뒤처지는 손가락질이 차라리 더 낫다. 아니 밤의 홍두깨라더니 바늘의 고통이 아찔하다. 중년의 삶에 집중하면서 오늘도 독서 토론 준비에 덮어 둔 책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