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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Jun 17. 2021

우린, 쇼핑메이트는 아닌 걸로

빛나는 새가 던져 준 진리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하릴없이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를 뚫고 앞으로 가지도, 뒤를 돌아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소호의 H&M 매장 입구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해맑이었다.      


  "일단 나가자."      


  "어떻게 가?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냥 맞고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잖아. 여기 계속 서 있으면 어떡해? 너 가려고 했던 카페 있잖아. 거기라도 가자."      


  가려고 했던 카페는 걸어서 10분 거리. 뛰어도 5분이 넘게 비를 맞아야 했다. 비는 하늘이 뚫린 듯이 쏟아졌다. 런던에서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는 것은 봤어도 이렇게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는 건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우산도 없었다. 쇼핑을 한지 두 시간 째. 소득도 없이 다리는 아프고, 비는 쏟아지고, 앉을 데도 없고, 갈 데도 없고, 게다가 우리는 방금 싸웠다. 미치겠네!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물방울을 만들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비가 떨어져서 물방울이 생기면 비가 많이 온다는 뜻이야’라고 했는데... 이대로 마냥 서 있을 수는 없겠다. 잠깐 비가 잦아든 틈을 타 카페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몇몇이 우리를 따라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땐 옷이며 가방이며 빗방울을 한가득 뒤집어 쓴 채였다. 빗물을 대충 털어내고 커피를 주문했다. 물기를 닦으러 화장실에 다녀오니 커피가 나와 있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앞에 두고, 우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답답함과 이해불가능한 감정들이 속에서 뒤섞였다. 뒤섞일 뿐만 아니라, 감정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부글부글했다. 찝찝함과 답답함이 만나 짜증으로 부풀어 올랐고, 이해불가능함과 나의 가치관들이 만나 끓어올랐다. 이것들이 다 뒤섞여 터질 것 같았는데, 침묵하며 다시 생각해봤다. 나는 왜 대체 이렇게 짜증이 나는 것인가. 지금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게 맞는 것인가. 마음이 좁아져서 그런 걸까. 아, 아무리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이 모든 사단은, 바로 다 런던의 추위 때문이다!                


  런던의 날씨는 예상보다 더 추웠다. 런던에서 입을 겉옷을 들고 올까 하다가 4일 밖에 안 되는 일정이라 짐에서 뺐다. 4일 후면 아르헨티나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시작으로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까지, 우리는 총 5개의 도시를 다닐 예정이었다. 날씨가 다 같으면 좋으련만 아르헨티나는 남극쪽으로 길게 뻗은 광활한 나라다. 이구아수 폭포가 있는 곳은 여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초봄, 바릴로체는 늦봄, 엘 칼라파테와 우수아이아는 초겨울인 식이었다. 여름옷부터 겨울패딩까지 챙기려니 짐이 어마어마했다. 우리는 과감하게 겨울패딩을 빼고, 겹겹이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챙겨왔다. 런던에서 입으려고 샀던 트렌치코트도 두고 와야만 했다. 하지만 이게 싸움의 발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히트텍 후드집업과 해맑의 얇은 다운점퍼를 껴입었는데도 도저히 런던의 바람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내게 점퍼를 내어준 해맑도 춥긴 매한가지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막이 점퍼를 하나씩 사기로 하고 소호에 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즐거웠다. 런던의 스트리트 브랜드를 검색해가며 매장에 들어가서 이 옷 저 옷 걸쳐보며, 이것도 예쁘다, 저것도 예쁘다, 신이 났었다. 그럼에도 해맑은 은근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서 쉽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건 품이 너무 넓어, 이건 재질이 이상해, 이건 어깨가 안 맞아... 내가 보기엔 다 괜찮았는데. 하여튼 예술 하는 남자들은 까다로워, 이런 생각을 하며 계속 옷을 골라주었다. 반면에 나는 어딜 가도 무난한 옷들을 찾아냈다. 고른 옷을 들고 해맑에게 괜찮냐고 물으면, 해맑은 번번히 별로라고 했다. 그건 별론데, 안 예쁜데, 그 색깔은 집에 있는 거잖아? 이런 얘기를 듣고 사기엔 찝찝해 내려놓기를 두 시간. 더 이상은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아까웠다. 마지막으로 들른 H&M에서 무엇이든 바람만 막아줄 수 있는 거라면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중에 적당한 가격의 카키색 야상이 하나 있었다. 


  "그거 집에 똑같은 거 있잖아"


  해맑이 공격했다. 


  "그건 패치가 붙어 있는 거고, 이건 패치가 없는 거잖아, 이거 살 거야" 


  이번엔 나도 지지 않고 맞수를 뒀다. 문제는 역시 해맑의 옷이었는데, 하나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데 웬 후드모자가 붙어 있었고, 하나는 모자가 없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등판에 웬 자수패치가 붙어 있었다. 해맑은 후드모자와 자수패치, 둘 다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다리가 아픈 나는 매장 직원만큼 열심히 해맑을 설득했다. 쇼핑을 한지 2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 일정을 이렇게 쓸 건 아니었는데. 30분을 거울 앞에서 같이 고민해주길 반복하다가 나도 지쳐버렸다. 앉아 있을 테니 고르고 오라고 했다. 10분이 지나 해맑은 빈손으로 왔다. 옷을 골랐냐고 하니,     


  "그냥 안 살래."      


  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갑자기 뻥 터져버렸다. 아니, 안 살 거면 왜 30분을 넘게 고민한 거야? 둘 중에 하나는 살 것처럼 심각하게 고민해놓고선! 인내심이 끊어졌다. 여기까지가 사건의 맥락이다.







  침묵을 깨고, 또다시 해맑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옷을 안사서 그래?"      


  아니 옷은 안 살 수도 있는 건데... 마음이 뒤엉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사?"      


  재차 들려오는 해맑의 말. 


  "나도 뭐 썩 마음에 들어서 산다고 한 줄 알아? 춥고, 시간은 없고, 힘드니까 적당한 거라도 사야겠다 한 거지."


  "아니 그래도 집에 가져가면 안 입을 게 뻔한데, 그런 걸 어떻게 사. 안 그래?"      


  "그럼 추운데 계속 이렇게 다닐 거야?"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던 김도 차차 희미해져갔다. 해맑의 말도 다 맞는 말이다. 누가 마음에도 안 드는 옷을 살까. 하지만 춥고 시간도 없는데 너무 까탈스럽지 않나 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계속 싸웠다. 마지막까지 입이 떨어지지 않게 막고 있었던 건, 지금까지 뾰루퉁해 있던 나의 괜한 자존심이었다.      


  "내가 미안해요~ 화 풀어요~~~ 응?"     


  나의 자존심마저 물러서게 하는 오빠의 다정한 말 한마디.      


  "발이 뜨거워~~~"     


  오래 걸으면 늘 발이 뜨거워지는 사람. 신발을 벗고 내 발 위에 뜨거운 발을 얹어 장난치는 사람. 해맑 때문에 결국, 입가에서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그러자 안도한 듯, 웃어 보이는 해맑. 런던의 플랫화이트 맛은 고소하고 약간 들쩍지근하면서 쌉싸름했다. 완벽한 맛이었다. 커피가 완전히 식어버리기 전에 화해를 해서 다행이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새침하게 맑은 런던의 하늘
환하게 개인 하늘처럼 환하게 개인 마음 
눈이 부시게 맑은 오후였다 




  다시 채비를 하고 거리를 나서니 그새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구름 사이로 파랗게 드러난 하늘이 눈부셨다. 도로와 건물에 빗방울이 달린 건지 빚방울이 달린 건지, 햇빛이 닿는 곳마다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그 때,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맑게 개인 하늘 위로 하얀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햇빛을 받은 새는 황금빛으로 빛났다. 와아- 하고 감탄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누르고 나니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황금 새 한 마리.      


  "오빠, 근데 저렇게 빛나는 새는 어떻게 그려? 어떤 그림은 보니까 그림인 줄 알고 보는데도 진짜 빛나는 것처럼 그렇더라?"      


  "주변에 아무 것도 안 그리면 돼."      


  "응? 안 그린다고? 그냥 종이 그대로?"     


  "응. 새 주변을 비워두고 배경색을 칠하면 빛나게 돼."      


  아무 것도 칠하지 않고 비워두는 것. 그것이 새를 빛나게 그리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나는 해맑을 내가 가진 색깔로 칠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슬리는 게 좀 있으면 어때, 그냥 지금 바람만 막을 정도로, 춥지 않을 정도로 된 옷을 고르라고. 내심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은 결정을 하지 않는 해맑을 이해가 안 된다며 공연히 화를 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날고 있는 오빠의 주변을 내가 가진 색깔로 칠하려 들었는지도.      





  아마도 그 흰 새는 날아가는 동안 자기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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