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거죠...?!
드디어, 아르헨티나 일주가 시작되는 날이 밝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바릴로체, 엘 칼라파테, 우수아이아에 갔다가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이과수를 다녀오는 루트. 무려 하루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는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일정이 넉넉했다면 한 도시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겠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뿐이었고,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만 다녀오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나라였다.
아르헨티나는 남미 대륙 전반에 걸쳐져 있는 광활한 나라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4계절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나라기도 하다.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바릴로체는 1년 내내 봄 날씨가 계속되고, 호수를 끼고 앉은 마을이 정말 예쁘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엘 칼라파테에서는 빙하를 볼 수 있는데, 이 빙하는 남극과 그린란드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빙하인 파타고니아 빙하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남미 대륙의 끝까지 내려가면 ‘세계의 끝’이라고 불리는 우수아이아가 있다. 이곳을 포기하기도 아쉬웠다. 사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북쪽 위에 있는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이구아수 폭포는 가지 말까 싶기도 했었는데 (그놈의) '언제 또 여길 와 보겠나' 싶어서 마지막으로 일정에 넣었다.
문제는 거리였다. 아르헨티나 남북 전체 길이가 3,694km인데 그 크기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최남단 서귀포 끝에서 최북단 강원도 고성까지의 길이가 대략 640km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6배가 넘는다. 면적으로 따지면, 한반도의 12.6배, 남한 면적으로 따지면 무려 27배나 큰 나라다. 이러니, 도시와 도시 간의 거리 역시 나로서는 상상 초월의 거리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바릴로체까지의 거리는 1,600km. 서울에서 대만까지의 거리와 맞먹는 거리다. 버스를 타고 가면 19시간이 걸리는 거리. 우수아이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는 3,000km. 서울에서 베트남까지의 거리다. 차로 쉬지 않고 달려 38시간이 걸리는 거리. 끔찍하다. 이걸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래서 보통 남미 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의 루트를 보면, 적어도 1박 2일 혹은 2박 3일로 일정을 잡는다. 이동하는데만 하루가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고 싶은 도시는 총 5곳. 그렇다면 적어도 아르헨티나 안에서만 꼬박 10~15일이 필요한 일정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7박 8일.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끽해야 도시 2~3곳을 가고, 그마저도 밤에는 잠을 포기하고 야간 버스에 몸을 맡겨야 하는 실정이었다. 야간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하루 놀고 그 다음날 밤에 또다시 야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를 3~4번 반복해야 하는데... 과연 우리의 체력이 받쳐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무리였다. 그렇다고 어느 한 곳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때 나는 아마도 직감했던 것이다.
이번이 아니면... 다신 올 수 없을지도 몰라.
운이 좋으면 20년 뒤에 다시 올 수 있겠지.
애 다 키워 놓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매일매일 비행기를 타자!
비행기를 타면 하루를 날려야 하는 이동거리를 2시간 반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7박 8일, 5도시를 하루에 한 군데만 들른다면 일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긴다! 이것의 문제는 돈이지, 뭐. 매일 비행기 값으로 (둘이 합쳐) 25만 원 정도의 돈이 들었다. 국내선 비행기 값만 120만 원이 필요했다. 뭐... 나에겐 신용카드가 있고, 돈이야 나중에 또 벌면 되는 거니까.
오늘의 아르헨티나는 오늘이 지나면 또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택시는 큰길을 달려 호르헤뉴베리(AEP) 공항으로 향한다. 이곳 역시 국제공항이지만 국내선을 타려면 이곳으로 와야 한다. 어느덧 팔레르모 공원을 지나 원형교차로에 들어섰다. 교차로 한가운데에는 대리석으로 된 높은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다. 택시가 교차로를 따라 돌면서 자연스럽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념비 아래쪽엔 고통과 억압을 받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이, 기념비 위쪽엔 마침내 자유를 쟁취한 듯한 여신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슷한 역사를 지나온 아르헨티나 사람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내 곧 공항에 도착했다. 여전히 긴장을 놓지 못한 채 택시에서 내렸다. 공항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부치러 갔다. 티켓을 끊고 출국장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입국심사대는 길게 뻗은 복도를 따라가야 입구가 있었는데, 무심코 복도를 걷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2층 복도의 한쪽면은 전면이 유리였는데, 유리창 너머의 풍경에 그만 발이 멈췄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는 커다란 가로수들과, 산책길 그리고 허리께까지 오는 담벼락 그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이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햇빛은 눈부시게 바다를 비추었다. 그 풍경 속에 캐리어를 끈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 노점상에서 파는 핫도그를 사 먹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와, 세상에 진짜 예쁜 공항이다!
우리는 유리창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조금 전의 긴장도 풀어헤치고, 유리창에 기대어 평화로운 풍경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듣기엔 무시무시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잠시의 긴장도 놓칠 수 없었던 이 도시의 비밀을 엿본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일상을 품은 도시였다니. 다른 도시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공항에 오지 않았을 테고, 그럼 우리는 이 풍경을 보지 못한 채로 돌아갔겠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일상의 한 조각을 훔쳐보고는,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이 도시가 정말 그렇게 공포의 도시인 걸까?
이 도시가 정말 긴장과 방어를 유지한 채 돌아다녀야 하는 도시인 걸까?
답을 얻지 못한 채로
비행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상공 위로 떠올랐다.